“무단 침입은 안 돼?” 시안이 뜬금없이 물어봤다. 가택침입죄 걸리고 싶어서 그러냐? 뭐라는 거야. 그 멍청한 말에 나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고 답했다. “아니, 바보야. 뱀파이어는 허락 없이 어디 들어가면 온 몸에서 피가 뿜어 나온다며.” 손을 공중에 휘적이면서 그녀가 말했다. 누가 누구 보고 바보래? 내가 책을 탁 덮고 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답을 바라는 눈빛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 사실이야. “그래도 그건 다 관점의 차이라서.. 조금이라도 틈을 열어둔 창문을 허락이라고 여기는 뱀파이어라면 들어가도 무사하겠지.” 그렇게까지 해서 들어가고 싶은 곳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안은 눈썹 하나를 들어 올리고 입술을 비죽였다. 그거 꼼수잖아! “꼼수 맞지.” 그 부분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다들 그..
깊숙하게 박힌 도끼를 빼내자 갈라진 두개골 사이로 진득한 뇌수가 흘러나왔다. 양손으로 힘을 주는 통에 바짓단에 튄 액체를 보다 혀를 쯧 찬 사만다는 시체의 셔츠에 지저분한 칼날을 닦았다. “죽은”지 꽤 된 소년은 몇 번 움찔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어쩌면 소년이 아니라 여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만다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렴 어떠냐고 중얼거렸다. 얼굴이 썩어 뭉그러지고 두피마저 떨어진 육체를 보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기에, “어머?” 끈질기네. 완전히 멈춘 줄 알았던 고깃덩어리가 반쯤 갈라진 머리로 움직이는 걸 봐도 놀라지 않은 그녀는 목구멍 안에서부터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시체의 두개골을 발로 강하게 즈려밟았다. 두터운 워커 아래로도 즈푹하고 살이 눌리고 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지겹..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초록색 내장과 시체, 그리고 공기를 가득 채운 비린내가 얼굴을 강타하는 것만 같았다. 역시 하루를 시작하기에 가장 끝내주는 일은 역시 주방을 가득 채우는 외계인 내장이다. 방금 출근했는데.. 눈앞에 훌쩍이는 옥탁트를 달래주며 난 생각했다.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자 여덟 개의 촉수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떨리고 세 개의 입이 동시에 말을 꺼내려고 하는 통에 물기 가득한 웅얼거림만이 귀청을 때렸다. “아.. 저.. 차근차근 말씀해주세요.” 옆에 놓인 박스를 그녀, 그, 외계인들의 성별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에게 건네주었다. 가족을 잃은 외계인은 하얀 휴지로 코를 킁 풀더니 남편이 갑자기 두 눈을 하얗게 뜨더니 오른손으로 자기 손목을 잘랐다는 이야기를 더듬더듬 풀어놓기 시작했다. ..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차들이 성냥갑처럼 앙증맞았다. 손안에 들고 있던 생강 쿠키가 가루를 떨어뜨리며 부스러졌다. 마지막 쿠키까지 입술 사이에 문 호레이쇼는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탈탈 털고 쿠키 조각을 완전히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이렇게 멀리 있는데 가루 좀 떨어진다고 누가 뭐라하겠어. 뻔뻔하게 자기 합리화한 그가 쿠키를 꿀떡 삼켰다. 알싸한 달콤함이 혀끝을 맴돌다가 버터의 고소한 향을 남기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이윽고 품안에 있던 수첩을 꺼내 몇 가지 단어를 휘갈긴 그가 그 페이지를 찍 찢어 공중에 날렸다. 그리고 팔랑팔랑 내려가는 종이 위에 사뿐히 올라탔다. 일반적인 물리법칙에 의하면 그 얇은 종이와 함께 곤두박질쳐야할 그의 몸은 천천히 내려왔다. 물속을 가라앉는 것마냥, 느리고 여유로웠다. 건물은..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져서 드리우지 않아 어두운 골목길의 고요함은 구두의 마찰음과 거친 숨소리로 산산조각 났다. 이미 감각이 사라진지 오래된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니 근육과 관절은 소리 없는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옆구리는 칼로 찢기듯이 쑤시고 무릎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길을 헤매면서도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처음에 봤을 때에는 그저 예쁘장한 여학생으로만 봤다. 그리고 자신의 음흉한 시선이 골반과 가슴께 머무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귀엽게 올라간 눈꼬리를 접으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의 섬뜩함을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남자는 점점 좁아지는 길을 불안한 눈빛으로 훑어봤지만 뒤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길을 ..
“레비씨, 이쪽 봐봐요.” 침대에 누워 여운을 느끼고 있던 레비는 고개를 뒤로 살짝 돌려 발견한 카메라에 놀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는 셔터 소리를 내며 사진을 찍었다. 손바닥만 한 화면 안에 갇힌 둥근 곡선, 산호색 머리카락, 그리고 물빛 눈동자. 흐름을 잃은 채 굳어있는 시간. “..뭐야?” 손안에 들어온 것과 똑같은 눈매로 레비가 말을 걸어왔다. 이불로 야무지게 몸을 가린 채 앞으로 기대자 목가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샴푸와 섞인 체향에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을 뒤로 뻗고 움푹하게 들어간 부분에 코를 묻었다. 작게 웃자 키득거리는 진동이 어깨를 타고 퍼졌다. 자국을 남길 수 없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끼며 가벼운 입맞춤을 드러난 어깨에 심었다. "예뻐..
강력 1반은 그 이름에 풍겨오는 이미지와 다르게 점심을 먹은 후 느긋하게 커피 한잔을 즐기고 있었다. 자주 있는 평화로움도 아니었고,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에 불과했지만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조용한 분위기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로움을 한방에 깨부순 건 문짝을 박차고 들어온 김두식이었다. 짧은 더벅머리에 뒷목까지 시원하게 드러난 와이셔츠. 손가락에 낀 굵은 금반지와 목에 걸린 금목걸이. 사람을 위축시키는 위협적인 눈매는 불쾌함에 젖어 더욱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다가 얼굴의 베인 흉터는 얼핏 보면 조폭 두목을 연상시키게 했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고 있던 형사들은 비록 놀라기는 했지만 곧 일사분란하게 일어나 그에게 경례했고 강력 1반 반장 김두식은 자기 자리로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안토닌 클라우드 향 - “어, 미안. 내가 늦었다.” 다리 위를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길을 나란히 걷는 일행에게 건네는 말소리, 공중에서 흩어지는 자동차 소리를 뚫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안토닌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사실 그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기도 전에 이미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와 손에 들고 있는 커피의 향에도 전부 가려지지 않은, 피비린내. 본능에 따라서 피를 마시고, 그렇기 때문에 처연한 존재들의 냄새. 훈은 오른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다른 손은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느긋하게 걸어갔다. 친구와의 약속에 5분 늦은 것 마냥 미안함과 가벼움이 적당하게 섞인 미소였다. 사실 영원을 사는 ..
로버트는 공중에 떠다니는 촛불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에 실을 매단 것도 아닌데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건 마법 때문이겠지? 집에서도 딱히 마법을 자주 사용하지 않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호기심에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꾸욱 억눌렀다. 착한 아이는 그러지 않을 거니까. 어머니가 마법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한 지 일 년도 안 되었을 때, 부엉이 한 마리가 집으로 와 편지를 주고 갔다. 로버트랑 놀고 있던 에밀리는 꺄륵하고 소리를 치며 살랑거리는 날개를 만지기 위해 오동통한 손을 내밀었고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로버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겨울 이불 안에 있는 깃털보다 부드럽다고 감탄하던 에밀리의 볼이 둥그스름하게 밝아졌다. 아이들이 창틀에 앉아 자신의 날개를 부리로 매만지는 ..
주변이 온통 빛으로 차있는데도 이렇게 절망스러울 수 있구나. 로버트 그레이엄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핀더파이어, 악마의 화염은 기이할 정도로 큰 불덩이를 토해냈다가 이내 불로 된 짐승으로 모습을 변모하고 있었다. 뱀처럼 벽을 길게 훑어가는 모습도, 불꽃으로 만들어진 용이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모습도 보고 있던 로버트는 문득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궜다. 아. 그제야 망토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그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망토를 벗어냈다. 어차피 소용도 없는 것. 핀더파이어에 닿은 것은 무조건 재로 돌아간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붉은 꽃. 물방울 하나가 또르륵 떨어지자 그는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비볐다.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워서 그런가보다.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