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감기는 피부가 보드랍다. 나긋한 발목이 한 손에 다 들어왔다. 좁은 발목에서 이어진 선이 발등으로 둥글게 이어졌다가 끄트머리의 앙증맞은 발가락을 피워냈다. 그 귀여움을 입에 살짝 무니 그녀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을 주어 움직임을 저지했다. 건강한 벚꽃색 발톱을 혀로 살살 굴리다가 젖은 소리와 함께 입을 뗐다. 차가운 시트와 달리 생기 넘치는 뽀얀 피부에서는 어린 아이와 숙녀 사이에 있는 듯 한, 우유와 비슷하기도 하고 동물성 기름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가 났다. 그럼에도 지나친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상냥하게 나를 감싸는 냄새에 이성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탄력 있는 살결에 얼굴을 비볐다. 복사뼈에 닿는 내 수염이 까칠하다고 투덜거리는 그녀가 귀여우면서도 ..
“쫑, 나가자.” 소녀는 빨간 목줄을 손에 들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다가 오늘이 되어서야 비가 계속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장마철이니 며칠간은 습기가 자욱하게 깔릴 것이다. 이런 날에는 산책하기 좋은 날씨야. 소녀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하며 목줄을 둘러매어주었다. 쫑이라는 이름의 금붕어는 소녀의 얼굴만한 눈을 꿈뻑이며 공중에서 살랑살랑, 꼬리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비늘이 축축한 공기속에서 반짝였다. 소녀의 붉은 입술이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기분 좋지, 쫑? 자기 몸의 두 배는 되는 금붕어의 옆면을 손으로 스을 쓰다듬어준 그녀가 우비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자기 친구와 비슷한, 주황색과 빨간색이 섞여있는 빛깔이었다...
기본적으로 영웅에게는 숨겨야하는 모습이 있다. 창작물에서도, 현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피터 파커라는 걸 드러내지 말아야하고, 슈퍼맨 또한 어수룩한 기자 클락 켄트를 연기하고, 배트맨은 평상시에 브루스 웨인으로 대외 활동을 한다. 물론 어떤 히어로는 그런 거와 상관없이 활동하지만. 금색과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곤 하던 인물이 떠올랐으나 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수연은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화장실 마법소녀”위에 커서를 올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클릭했다. 곧 수백 개의 짤막한 기사들과 수십 개의 영상들이 화면과 그녀의 눈을 가득 채웠다. 천장에서 바라보는 각도라서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어제 머리에 하고 간 핀이 선..
흐린 날씨를 싫어하진 않는다. 서늘하면서도 촉촉한 공기며, 창문을 열 때 후욱 하고 들어오는 시원함과 어딘가 소름을 오소소 돋게 하는 빗소리를 좋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게 한 달 넘도록 지속된다면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나라도 조금은 늘어지기 마련이다.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김이 세게 새어나오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덜그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가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고 준비해놓은 잔에 물을 조로록 부었다. 바닥에 봉곳 솟아오른 커피가루와 뒤엉킨 설탕이 뜨거운 물에 유순하게 녹아내렸다. 진한 갈색 액체가 찰랑찰랑 차오르자 주위가 커피향으로 가득했다. 비가 오거나 습한 날에는 냄새분자들이 더 빠르게 움직여서 커피맛이 더 좋다는데, 그 말에 백번 공감한다. 하얀 잔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차오른 커피가 쏟아지..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다. 돈으로 우정을 살 수 없다. 돈으로 건강을 살 수 없다. 대부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진실된” 무언가가 있다는 희망을 주는 말이다. 그리고 돈의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의 헛소리일 뿐이다. 사랑이나 우정을 돈으로 살 수 없다니, 만약에 누가 뛰어난 연기자에게 일생동안 타인의 사랑하는 연인, 혹은 친구를 연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면, 그리고 당사자가 그걸 알지 못한다면?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그 연기자가 일생을 같이 보낸 연인이며, 평생을 사귄 친구가 될 것이다. 건강한 신체를 위한 질 좋은 식재료, 주기적인 건강 검진, 그리고 치료약 또한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게 아니다. 건강하지 않은 빈민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순진한 말은 ..
“어이, 거기 아저씨.” 웃음기를 품은 미성과 몸을 흔드는 손길에 대니얼 고드워드는 흠칫하며 일어났다. 입가에 축축함을 소매로 닦아 졸고 있는 자신을 보고 키득거림을 흘리던 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여기서 주무시면 입 삐뚤어져도 몰라요? 아직도 졸음에 취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엘리자베스가 종종걸음으로 빨래를 걷으러 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걸 확인한 남자는 흔들의자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눈을 감을 때에는 한낮이었는데. 변명하듯이 말을 흘리는 대니얼에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리즈가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석양을 등지고 있었다. “됐고, 이리 와서 이거나 들어줘.” 대니얼은 흰 시트를 가리키는 그녀를 향해 미적미적 걸어가서 이불 더미를 품에 가득..
휠체어에 앉아있을 때면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쾌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 선심 쓰는 눈빛. 아래로 늘어뜨린 눈매에 맺힌 비웃음과 연민, 그리고 동정이 끔찍하게 싫었다. 프리마 돈나의 머리 위로 떨어진 조명처럼, 로희의 커리어는 산산조각 났다. 오, 불쌍한 로희.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구나. 그래도 먹고 살만한 돈은 있잖아? 그리고 무대에서 그렇게 화려하게 은퇴하다니 기억에는 남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의 입술을 갈라버리고 성대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로희는 무릎 위이 담요에 놓인 카드를 집었다. 병실에 누워있을 때, 어떤 사람이 주고 간 명함이었다. 얇고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손가락의 피부를 베었지만 로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런..
나는 악당이다. 그것도, 천하에 둘 없을 정도로 비정하고 냉혹하고, 잔인한 악당. 나는 하나의 나라를 침략해서 그 곳을 식민지로 만들어 총독으로서 민중을 착취하던 인물이다. 대외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돕기 위한 조치였다고 그들을 기만했다. 심지어 민중들을 이간질하여 일부의 부유층들이 나를 지지하게끔 만들었다. 모든 정치적인 활동에는 돈이 필요하다. 돈이 없다면 아무리 굳건한 의지라도 모두에게 관통할 수 없다. 그리고 내 계획은 성공했다. 이리저리 꼬아놔서 복잡한 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숨겨진 음험한 욕망을 꿰뚫어보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미약한 그들의 목소리는 소용돌이처럼 거세게 부는 바람과 거칠게 이는 파도, 그리고 뿌옇게 끼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기척을 감지한 센서가 팍, 하고 전등을 켰다. 아래로 내리쬐는 불빛이 신발을 벗기 위해 허리를 숙인 지성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늘 낮에 카레 관련 요리서적을 쳐다보던 남자가 생각났다. 카레요리 100선이었나, 카레로 만드는 요리 100가지였나. 책 제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카레에 대한 열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인사하던 청년의 이름은 또렷하게 생각났다. 리브겔트. 하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었을까 지성은 그 날 저녁을 카레로 아주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두고두고 먹을 수 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 찬거리로 묵직해진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기중에 가라앉았다. 문지방을 넘고 집안으로 들어간 지성은 제복 코트부터 벗어서 의..
“시스템 밖에 있는 놈들을 잡으려면 너도 시스템 밖으로 가야지.” 화약으로 작동하는, 구식 총을 손에서 굴리며 그녀가 말했다. 아직도 그런 총을 제조하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압수해야겠네요. 내가 테이저를 들이대며 씹어뱉었다. 설마 심연을 들여다보면 자기도 괴물이 된다는 그런 헛소리를 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떨리는 손끝을 숨기기 위해 목소리에 한껏 비아냥거림을 담았다. 선배, 아니 지금은 단순한 범죄자 M이 싱긋 웃었다. 자기를 향한 총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뻔뻔함에 시야가 붉게 물들 것만 같았다. 약간의 허무함, 체념, 그리고 가여워하는 것 같은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줄곧 노력했던 모든 걸 다 버리고 신기루를 쫓아가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