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당신이 있다는 걸 알아요. 저기 달 말이에요. 거기에 있는 거 맞죠? 나도 알아요. 우주에는 공기가 없어서 내가 여기서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 만에 하나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식”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달로 이주하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그래도 난, 당신이 돌아왔으면 해요. 미안해요.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요즘 사람들이 뒤에서 내 얘기하는 게 많이 들려요. 젊은 여자가 미쳐버린 거 아니냐고. 재미있더라고요. 내가 웃으면서 인사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날씨얘기나 하고. 하지만 그 사람들은 틀렸어요. 난 어느 때보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두 달 전보다 훨씬, 훨씬 더 세상을 또렷하게 보고 있..
달과 머리카락 “달은 왜 가끔 주황색이죠?” 모르면 대답 안 해도 돼요. 언니가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녀가 자기 옆에 앉아있던 어른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말을, 무심하게 던졌다. 가벼운 말씨는 잔디밭을 통통 튀어 다니다가 여자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뭐어? 모르면 대답 안해도 돼? 맹랑한 꼬맹이 같으니라고. 아얄라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석양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귀엽게 귀 밑에서 달랑거렸지만 아이의 말이 영 귀엽지 않았다. “그건 당연히 달이 부끄러워하니까 그런 거지!”“..그러면 빨개져야하는 거 아니에요?”“빠..빨개지는 건데! 어, 원래 달은 치즈로 되어 있잖아? 그리고 치즈는 노란색이고!” 그러니까 빨강에 노랑이 섞여서 주황이 된다~ 이 말씀이야! 자기가 듣기에도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고,..
'미지근해진 아이스커피'에서 떠오르는 것으로 써보자! 결국 너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끝났잖아. 차가운 목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하다. 제발, 연락하지 마 언니. 한숨을 가까스로 집어삼킨 네가 나를 타일렀다. 알아.. 아는데. 나는 횡설수설하려는 입을 틀어막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30분, 아니 10분이라도 좋으니까 만나자. 할 얘기가 있어. 거짓말이었다. 할 얘기는 없었다. 너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고 나는 그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네 마음이 이미 떠났는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의 한심한 거짓말을 다정한 너는, 상냥한 너는 기나긴 침묵 끝에 대답했다. 생각해볼게. 그 말에서 바늘구멍보다도 작은-그래도 여전히 희망인-희망을 느낀 나는 몇 번이고 고..
당신은 나의 중력이었습니다. 달에 공기가 없는 이유는 중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 때였나? 아무튼 과학 시간에 지나가듯이 언급하는 토막 상식. 시험에는 달이 시간에 따라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왼쪽이 통통한 게 상현달인지 하현달인지-나왔지만 나는 그 문장을 제법 곱씹어보았어요. 인간은 지금까지 언제나 중력을 이기기 위해서 노력해왔음에도 결국 그 중력덕분에 숨 쉴 수 있다는 사실이, 지독한 블랙 코미디의 일부만 같았거든요. 그런 면에서 당신은 나의 중력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장대 높이뛰기를 하는 선수들에게 중력은 이겨 내야하는 대상이지만 무사히 땅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듯이, 당신의 슬하에서 자란 나는 항상 당신을 이겨먹고 싶어 했으니까요. 중력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너는 나의 중력이었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주위를 맴돌던 그 힘은 내가 땅에서 아주 살짝, 뛰어오를 때마다 무한한 뿌듯함을 느끼게 했고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 만큼 했으면 됐지. 네 능력으로는 이런 결과도 대단한 거야. 그러니까 적당히 하자. 온 힘을 다해서 뭐해? 너는 나를 위한답시고 달콤한 말을 속삭였지. 그 말의 달콤함이 내 발목 주변에 끈적하게 달라붙기 시작한 걸 깨달을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함정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혀끝에 맴도는 감각은 강렬했기에. 네가 사라진 다음에야 내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 늪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가만히 있을 땐 안락하지만, 움직이려고 할 땐 조금씩 나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그 늪. 하지만 날아오르지 못하게 내 날개를 움켜쥐던 너는, 내 한..
배 아파. 배 아파. 배 아파. 내장을 쥐어짰다가 안쪽에서 늘어나는 것만 같은 통증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긴장할 때마다 겪는 고통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 그러니까 뭣도 모를 때에는 하루하루가 행복해서 모르고 있다가 조금씩 나이를 먹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인생의 쓴맛을 알게 되는, 그런 흔하디 흔한 이야기. 그럴 거면 좀 더 평범하게 위염이라든지 손에 땀이 유난히 많이 찬다든지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로 했으면 오죽 좋아. “우읍..” 헛구역질이 올라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위(胃)에서, 목구멍에서, 입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각을 어떻게든 다시 억누르려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하지만 ..
약간의 인셉션+아포칼립스 느낌?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 시작했다. 엄마가 단순히 늦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한 딸아이도 아내가 피곤하겠다고 판단한 남편도, 신입사원이 지각이라고 혀를 찬 상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건강상의 문제가 당장 생긴 것도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영양 공급을 하지 않으면 천천히 아사하게 되지만-그래서 1인 가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일었다-그렇기 때문에 발견하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고 그 후로는 수액이든 뭐든 연결해놓는 조치를 취한다. 뇌파 또한 혼수상태인 인간이 보여주는 모습과 달랐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냥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것이다 호르몬 균형에도 문제가 없었고, 잠든 사람들 모두 렘수면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
1인칭 주인공 시점 연습하는데 어렵네 나는 원래부터 감이 좋았다. 아니면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는 늘 사람들이 원하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요정이 훈수를 두듯이, 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제법 평범한-짜증날 정도로 돌려 말하는 어른들을 만날 때 말고는-재능 혹은 능력이었다. 그 날 아침, 웬 까치 한 마리가 방 창문에 앉아있었다. 말할 때마다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추운 날인만큼 창문을 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저리 가라고 창문 앞에서 팔을 흔들어댔지만 그 까치는 아무렇지도 않게 창문의 유리를 콕콕 쪼아댔다. 아 씨, 진짜. 내가 미간을 구기면서 창문을 열려던 그 때, 까치가 부리를 벌리더니 묘한-새 기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