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로 말이 없나요 스튜어트씨?" 평소라면 지겹다거나 먼저 죽이라고 하셨을 텐데 말이에요? 사만다 스튜어트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다가 한 박자 늦게, 제법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여름처럼 싱그러운 녹색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다. 많은 사람들이 클로이 에반스를 언급할 때 타오르는 듯 한 그 주홍빛 머리카락을 먼저 꼽는다. 사만다에게는 중요치 않았지만. 머리카락은 다른 색을 입힐 수도, 길이가 짧아질 수도, 심지어는 가발로도 가릴 수 있다. 하지만 눈은, 떨리는 눈꺼풀도, 흔들리는 동공도, 방황하는 시선도 숨길 수 없는 눈은, 변하지 않는다. 강산이 몇 번이고 변한 세월동안에도 바뀌지 않은, 메마른 잎사귀를 품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만다에게는 안에 머금은 감정들이 ..
w.잡초양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빠른 비트의 음악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타카미네 미도리는 양손으로 잡은 햄버거를 야무지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 턱을 손에 괸 채 앉아있는 모리사와 치아키를 바라보았다. 자기 몫으로 시킨 햄버거 세트, 많이 먹어서 키가 더 커지면 우울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하기에는 너무 배가 고팠다,와는 다르게 치아키의 앞에는 감자튀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많이 먹어라 타카미네!” 성장기니까 말이다! 뿌듯한 치아키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미도리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여기서 더 크고 싶지도 않아요.. 미도리의 투덜거림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치아키의 적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 애정 어린 시선에 목가가 달아오르는 것..
The Way You Look Tonight w.잡초양 8시.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밝지는 않은 시간. 낮과는 다르게 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하게 아래에 깔렸다. 스티브는 혹여나 힘을 너무 주지 않게 주의하며 휠체어 손잡이를 가볍게 쥐어 밀었다. 잘 포장된 비탈길을 내려온 후 잔디로 들어서자 바퀴 아래로 푹신함이 이어졌다. 춥진 않아요, 페기? 스티브가 나지막하게 물어봤다. “걱정할 필요 없어, 스티브.” 페기가 눈썹 하나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나이는 들었어도 유리 인형은 아니라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가득차있었다. 젊어서나 나이가 들어서나 페기 카터는 페기 카터구나, 라고 스티브는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동경하던 굳건한 사람. 달려오는 차 ..
손바닥에 감기는 피부가 보드랍다. 나긋한 발목이 한 손에 다 들어왔다. 좁은 발목에서 이어진 선이 발등으로 둥글게 이어졌다가 끄트머리의 앙증맞은 발가락을 피워냈다. 그 귀여움을 입에 살짝 무니 그녀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손에 힘을 주어 움직임을 저지했다. 건강한 벚꽃색 발톱을 혀로 살살 굴리다가 젖은 소리와 함께 입을 뗐다. 차가운 시트와 달리 생기 넘치는 뽀얀 피부에서는 어린 아이와 숙녀 사이에 있는 듯 한, 우유와 비슷하기도 하고 동물성 기름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가 났다. 그럼에도 지나친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상냥하게 나를 감싸는 냄새에 이성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탄력 있는 살결에 얼굴을 비볐다. 복사뼈에 닿는 내 수염이 까칠하다고 투덜거리는 그녀가 귀여우면서도 ..
“쫑, 나가자.” 소녀는 빨간 목줄을 손에 들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 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다가 오늘이 되어서야 비가 계속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장마철이니 며칠간은 습기가 자욱하게 깔릴 것이다. 이런 날에는 산책하기 좋은 날씨야. 소녀가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하며 목줄을 둘러매어주었다. 쫑이라는 이름의 금붕어는 소녀의 얼굴만한 눈을 꿈뻑이며 공중에서 살랑살랑, 꼬리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비늘이 축축한 공기속에서 반짝였다. 소녀의 붉은 입술이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기분 좋지, 쫑? 자기 몸의 두 배는 되는 금붕어의 옆면을 손으로 스을 쓰다듬어준 그녀가 우비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자기 친구와 비슷한, 주황색과 빨간색이 섞여있는 빛깔이었다...
기본적으로 영웅에게는 숨겨야하는 모습이 있다. 창작물에서도, 현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피터 파커라는 걸 드러내지 말아야하고, 슈퍼맨 또한 어수룩한 기자 클락 켄트를 연기하고, 배트맨은 평상시에 브루스 웨인으로 대외 활동을 한다. 물론 어떤 히어로는 그런 거와 상관없이 활동하지만. 금색과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등장하곤 하던 인물이 떠올랐으나 수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수연은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화장실 마법소녀”위에 커서를 올리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클릭했다. 곧 수백 개의 짤막한 기사들과 수십 개의 영상들이 화면과 그녀의 눈을 가득 채웠다. 천장에서 바라보는 각도라서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어제 머리에 하고 간 핀이 선..
흐린 날씨를 싫어하진 않는다. 서늘하면서도 촉촉한 공기며, 창문을 열 때 후욱 하고 들어오는 시원함과 어딘가 소름을 오소소 돋게 하는 빗소리를 좋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게 한 달 넘도록 지속된다면 아무리 비를 좋아하는 나라도 조금은 늘어지기 마련이다.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김이 세게 새어나오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덜그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창가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고 준비해놓은 잔에 물을 조로록 부었다. 바닥에 봉곳 솟아오른 커피가루와 뒤엉킨 설탕이 뜨거운 물에 유순하게 녹아내렸다. 진한 갈색 액체가 찰랑찰랑 차오르자 주위가 커피향으로 가득했다. 비가 오거나 습한 날에는 냄새분자들이 더 빠르게 움직여서 커피맛이 더 좋다는데, 그 말에 백번 공감한다. 하얀 잔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차오른 커피가 쏟아지..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다. 돈으로 우정을 살 수 없다. 돈으로 건강을 살 수 없다. 대부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진실된” 무언가가 있다는 희망을 주는 말이다. 그리고 돈의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의 헛소리일 뿐이다. 사랑이나 우정을 돈으로 살 수 없다니, 만약에 누가 뛰어난 연기자에게 일생동안 타인의 사랑하는 연인, 혹은 친구를 연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면, 그리고 당사자가 그걸 알지 못한다면?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그 연기자가 일생을 같이 보낸 연인이며, 평생을 사귄 친구가 될 것이다. 건강한 신체를 위한 질 좋은 식재료, 주기적인 건강 검진, 그리고 치료약 또한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게 아니다. 건강하지 않은 빈민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순진한 말은 ..
“어이, 거기 아저씨.” 웃음기를 품은 미성과 몸을 흔드는 손길에 대니얼 고드워드는 흠칫하며 일어났다. 입가에 축축함을 소매로 닦아 졸고 있는 자신을 보고 키득거림을 흘리던 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여기서 주무시면 입 삐뚤어져도 몰라요? 아직도 졸음에 취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엘리자베스가 종종걸음으로 빨래를 걷으러 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걸 확인한 남자는 흔들의자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 눈을 감을 때에는 한낮이었는데. 변명하듯이 말을 흘리는 대니얼에게 입꼬리를 들어 올린 리즈가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석양을 등지고 있었다. “됐고, 이리 와서 이거나 들어줘.” 대니얼은 흰 시트를 가리키는 그녀를 향해 미적미적 걸어가서 이불 더미를 품에 가득..
휠체어에 앉아있을 때면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쾌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 선심 쓰는 눈빛. 아래로 늘어뜨린 눈매에 맺힌 비웃음과 연민, 그리고 동정이 끔찍하게 싫었다. 프리마 돈나의 머리 위로 떨어진 조명처럼, 로희의 커리어는 산산조각 났다. 오, 불쌍한 로희.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구나. 그래도 먹고 살만한 돈은 있잖아? 그리고 무대에서 그렇게 화려하게 은퇴하다니 기억에는 남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의 입술을 갈라버리고 성대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로희는 무릎 위이 담요에 놓인 카드를 집었다. 병실에 누워있을 때, 어떤 사람이 주고 간 명함이었다. 얇고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손가락의 피부를 베었지만 로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