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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사각사각 긁는 만년필 소리만이 사무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남은 서류를 확인하고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손을 놀렸다. 아무리 최강의 검사이자 홀든 가문의 차기 가주라 해도 서류처리는 고역이었다. 다시 펜의 마찰음만이 방을 채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사무실 문 밖의 기척을 느꼈다. 금세 사라지거나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그 인물은 문 앞에서 계속 서성였다. 그래도 그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해서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살짝 열리면서 흑발의 양갈래를 한 마를렌 르 블랑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찻잔이 놓인 쟁반이 들려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찻잔이 흔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이따금 책상 쪽으..
“샬럿, 난 괜찮아. 그렇게 걱정할 건 없어.” 숨을 색색 내쉬면서도 누워있는 소녀는 다른 소녀를 안심시키려고 살짝 웃어보였다. 우유에 홍차 한 방울을 섞은 것처럼 볼이 붉게 달아오른 흑발의 아이는 평소에 높게 묶던 머리를 푼 채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래도 옮을 수 있으니까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는 말고. 침대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푸른 양갈래의 소녀는 머뭇거리면서 물러나지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마를렌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며 부탁했다. “..아, 나 생각났어. 그거... 홍차 한 잔 끓여줘. 샬럿이 해주는 게 제일 맛있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은 샬럿은 기뻐하며 방을 나가 부엌으로 총총 걸어갔다. 금방 오겠다며. 멍한 머리로도 아이가 웃음 짓자 안심해..
다이무스 홀든의 장례식은 의아할 정도로 간소했다. 유력가문의 장남이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직접 애도를 표하기를 희망했으나 홀든 가문은 이런 요구들을 정중히 사양했다. 그가 몸담고 있던 헬리오스, 동맹이었던 지하연합,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만 참석한 자리였다. 돌로 세워진 비석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간간히 들리는 울음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마를렌 르블랑은 검은 원피스를 입고 검은 우산을 든 채 눈을 내리깔았다. 무채색의 소녀에게 있어서는 그녀의 머리카락사이에 자리 잡은 하늘색의 머리장식만이 유일하게 색채를 띠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 양갈래를 한 소녀는 검은 구두에 감싸진 자신의 발끝을 멍하니 바라봤..
당신이 빌로시티의 그 더러운 뒷골목에서 나에게 손을 내민 그 순간부터, 나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유리창 너머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발이 짙푸른 밤하늘을 수놓았다. 소복소복 쌓이는 하얀 눈을 바라보던 흑색 양갈래의 소녀는 창문에 바짝 달라붙었다. 입을 살짝 벌려 하-하는 소리를 내자 투명한 유리가 뿌옇게 물들었다. 손가락을 살포시 얹어 움직이자 물기 어린 흔적이 별을 그려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물빛의 소녀는 붉은 눈동자로 이를 따라 움직이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옆에 얹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한참을 머뭇거린 아이는 흩어지는 뿌연 기운을 안타깝게만 바라봤다. 미묘한 표정변화를 알아차린 마를렌이 살짝 젖은 별을 제외하고는 투명해진 유리에 다시 입김을 내었다. 마를렌의..
공항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행기를 타고 어디로 떠날 사람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 여러 가지 목적들이 샐러드처럼 한 곳으로 엉켜있는 모양새였다. 감색의 어두운 빛깔로 가득한 뒤통수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인상적으로 큰 키와 옅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은 어디에서나 주목 받을만 했다. 두근거린다. 정직은 서율이라는 두 글자가 써진 작은 플랜카드를 들고 뜀박질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자기도 모르게 발끝을 바닥에 톡톡 두들기며 그는 설렘과 긴장이 뒤엉킨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서 보고 싶다. 미국에서 들어오는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오자 정직의 심장은 더욱 빨리 뛰었다. 혹시나 자기가 그를 놓칠..
“서이환!” 우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이환에게 다가갔다.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 뒤에서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백우씨.” 늦었습니다. 지금 몇 시인지 아십니까?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은 우에게 이환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사람이 좀 늦을 수도 있지. 어떻게 항상 딱딱 맞출 수 있겠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넘기려고 하자 이환이 입술을 떼려고 시작하려 했으나 우가 이환의 등을 툭 치면서 말이 끊겼다. 어쨌거나 지금은 축제 구경해야지! 발랄하게 말을 하고는 팔을 휘적거리며 앞장섰다. 의외로 많은 인파에 둘은 잠시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길을 잃어 서로 엇갈릴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턱을 살짝 안으로 끌어당긴 ..
고통으로 눈을 찌푸리며 대니얼은 자신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너무 한가하게 지내왔던 탓일까. 뒤에서 다가오는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해버렸다. 자신에게 칼을 겨눈 그 사람은 숲을 혼자 다니는 여행객들의 뒤를 노리는 강도인 듯했다. 하찮은 좀도둑이라는 건 단검이 등을 파고들었음에도 저항하고 견딘 대니얼을 보고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리던 남자의 동공에서 알 수 있었다. 경험도 부족한지 망토에 가려졌던 대니얼의 체격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기도 했고. 아마 칼에 찔리고도 거세게 저항하는 사람을 본 적이 지금까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위협하기만 해도 창백해지면서 투항하니. 하지만 대니얼은 누구를 해치기 위해 어떤 각오가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었고, 그 남자는, 비록 칼을 들고 타인을 해치려고 했어도, 그걸 모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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