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잡초양 주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빠른 비트의 음악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것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타카미네 미도리는 양손으로 잡은 햄버거를 야무지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자기 앞에 턱을 손에 괸 채 앉아있는 모리사와 치아키를 바라보았다. 자기 몫으로 시킨 햄버거 세트, 많이 먹어서 키가 더 커지면 우울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하기에는 너무 배가 고팠다,와는 다르게 치아키의 앞에는 감자튀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많이 먹어라 타카미네!” 성장기니까 말이다! 뿌듯한 치아키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미도리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여기서 더 크고 싶지도 않아요.. 미도리의 투덜거림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치아키의 적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 애정 어린 시선에 목가가 달아오르는 것..
The Way You Look Tonight w.잡초양 8시.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밝지는 않은 시간. 낮과는 다르게 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하게 아래에 깔렸다. 스티브는 혹여나 힘을 너무 주지 않게 주의하며 휠체어 손잡이를 가볍게 쥐어 밀었다. 잘 포장된 비탈길을 내려온 후 잔디로 들어서자 바퀴 아래로 푹신함이 이어졌다. 춥진 않아요, 페기? 스티브가 나지막하게 물어봤다. “걱정할 필요 없어, 스티브.” 페기가 눈썹 하나를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내가 나이는 들었어도 유리 인형은 아니라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가득차있었다. 젊어서나 나이가 들어서나 페기 카터는 페기 카터구나, 라고 스티브는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동경하던 굳건한 사람. 달려오는 차 ..
토니 스타크는 드물게 좋은 기분으로 눈을 떴다. 예전처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파티하거나 수면장애로 인해 침대에서 뒤척이는 일은 사라졌지만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힘에 부친 토니였다. 그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자신을 칭찬하고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어와 방 안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을 부지런히 달리는 자동차 소리며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가는 거리의 소란스러움은 고층 건물 벽을 타고 올라오면서 공중에서 흩어졌다. 적당히 참아줄 만큼 뉴욕이 부산스레 웅성거리는 걸 침대에 파묻힌 채 듣고 있던 토니는 자신의 옆으로 손을 뻗어 더듬었다. 옆에 누워있던 사람이 오래전에 일어났는지 냉랭한 시트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
테라스에 서있으니 나긋한 바람이 스티브의 머리카락사이를 지나갔다. 난간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은 그가 눈을 살며시 감고 아직 서늘한 공기를 깊이 들이켰다. 좀 더 있으면 여름이 되겠지. 그 때가 되면 밤에도 더울테니 지금의 시원함을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키스라도 해주길 바라는 거야?”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니. 눈을 뜨니 자기 눈높이보다 조금 위에서 동동 떠있는 토니가 보였다. 양 손과 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꽃으로 요령 좋게 균형을 잡고 있는 그에게 스티브가 입을 열었다. “안녕, 허니. 로미오라도 부를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전자음 하나 섞이지 않아 깨끗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물씬 묻어나왔다. 금속질의 붉은 몸체에 군데군데 금색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
파피루스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렸다. 샌즈에 의해 억지로 벌려진 다리는 힘겨운 듯이 바르르 떨렸고, 뒤로 꺾인 채 고정된 팔에서 둔탁한 고통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이따금 발버둥치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거리곤 했지만 재갈을 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신음과 비명 사이의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샌즈가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다가 어느 부분을 건드리자 파피루스는 자지러지듯이 움찔거렸다. 이율배반적으로 힘을 얻어가는 물건은 자극으로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고 제대로 다물 수도 없는 입술에서는 연약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잔뜩 괴로워하는 얼굴을 하면서도 자기 아래에서 헐떡이는 남자를 무자비하게 범하던 샌즈는 거칠게 허리를 흔들다가 속도를 높였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파피루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안된다..
제임스 타이베리우스 커크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최근 잇따른 임무들로 지친 신체는 휴식을 갈구하고 있었건만 그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머리에 닿은 베게의 감촉도, 몸 아래에 짓눌리는 매트리스와 시트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짐을 부드럽게 잠으로 이끌어줄 엔터프라이즈의 엔진소리마저 도와주지 못했다. 결국 그는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속에서 확실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책상 위에 놓여있을 서류를 떠올리며 시선을 옮겼다. 잠도 안 오는데 차라리 서류나 처리할까. 머리 한 구석에서 말도 안된다고 스스로를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정도로 절실했다. 끝없는 활자들의 나열에 집중하면 어느 순간 잠에 들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은 채 고민하던 짐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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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레이나 MRI와 같은 자질구레한 검사를 마친 토니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스프링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고 매트리스가 깊이 꺼졌다가 다시 튀어오르는 동안 그는 최첨단 의료 시설을 가진 쉴드라 할지라도 환자용 침대는 거기서 거기라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시트도 분명 흰색에 쉴드 로고 패턴이 있을 것이다. 의사가 서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방향으로 토니가 고개를 들었다. 검사 결과를 분석하는 동안 의사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짧은 순간조차 견딜 수 없었는지 그는 성마르게 재촉했다. 뭔데. 퉁명스럽게 던진 한 마디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듯 한 침묵을 박살냈다. 헛기침을 한 뒤 의사가 말을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남자의 목소리가 의외로 젊게 느껴졌다. “시신경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말을 ..
식장은 크리스티네 프리츠와 이글 홀든의 결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내와 함께 하객을 맞이하던 제레온은 잠시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는 홀든 경 부부를 볼 수 있었다. 좋은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그와 사돈을 맺게 되어 그는 기뻤다. 부부의 곁에는 그들의 세 아들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의젓했던 첫째 다이무스와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잘 따르던 벨져 그리고 크리스티네의 남...편이 될 이글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결혼 예복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이글 홀든은 준수한 외모를 가진 미청년이었고 눈을 세로로 길게 지나가는 흉터조차 그에게 흠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홀든이라는 이름이 증명하듯이 수준급의 검술을 구사하기도 한다. 또한 크리스티네가 지향하는 검의 길을..
종이를 사각사각 긁는 만년필 소리만이 사무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남은 서류를 확인하고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손을 놀렸다. 아무리 최강의 검사이자 홀든 가문의 차기 가주라 해도 서류처리는 고역이었다. 다시 펜의 마찰음만이 방을 채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사무실 문 밖의 기척을 느꼈다. 금세 사라지거나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그 인물은 문 앞에서 계속 서성였다. 그래도 그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해서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살짝 열리면서 흑발의 양갈래를 한 마를렌 르 블랑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찻잔이 놓인 쟁반이 들려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찻잔이 흔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이따금 책상 쪽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