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연금술사는 변덕스럽다. 어떤 날에는 서재에 몇날며칠동안 틀어박혀서 연구를 진행하고, 또 다른 날에는 몇 시간째 의자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늘어져있기도 한다. 엠마가 이 노인네가 앉은 채 죽은 게 아닌가하고-절대로 걱정되어 그런 게 아니고 시체를 치우고 싶지 않아서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확인할 때면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 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을 먹고 아이델라가 만든 공식을 한번 확인하고, 엠마에게는 새로운 과제를 내주었다. 그러다가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그 즈음, 서재에서 낡은 서류가방을 가져 온 호레이쇼가 얘기했다. “나갈 준비 하거라.” 그러면서 머리 위에 모자를 얹었다. “어디 가시게요?” 젊은 연금술사가 아주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자 노인은 대답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한동안 손에 쥐기만 한 훈은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세 갈래로 나누고 번갈아가며 땋기 시작했다. 틈틈이 유투브 동영상을 보면서 연습한 결과 이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늘을 닮아 가느다랗고 결이 좋은 머리카락이 춤추듯이 규칙적으로 반복되어 단정한 모양이 되었다. 지우가 신이 나서 저도 모르게 다리를 흔들고 고개를 움직이는 바람에 조금씩 삐뚤어질 때마다 훈은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모니 이모 만나러 가는 게 그렇게 좋아?” 여러 갈래로 땋아진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모으면서 머리끈을 반대 손에 건 훈이 물어봤다. 그러자 지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손에서 빠져나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다시 붙잡..
*금발이 얀데레스러운 멘탈뼝자고 병약한 척할 경우* 창문을 가리는 얇은 커튼과 머리를 받치는 베개의 푹신함, 그리고 익숙한 방의 분위기. 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눈을 떴어. 그런 뒤에 방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은근한 햇살이 시야를 빨갛게 물들일 만큼 강렬하지 않고 그렇다고 눈이 시릴 정도로 집요하지 않을 걸 보니 오후일 거라고 생각했지. 4시? 어쩌면 5시일수도 모르고. 자다가 일어난 거 치고는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웃음이 나올 뻔했어. 아이보리색 커튼에 주황색을 덧칠하는 자연의 빛깔에서 관심을 거두고 방구석으로 눈을 돌렸지. 거기에 네가 서있더라. 항상 쓰고 다니는 모자는 탁자에 얹어두고 얼굴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서 그런지 창백한 얼굴만 동동 떠다니는 거 같았어. 내가 쓰러졌다는 ..
집안 빚을 갚기 위해 정략혼으로 시집살이하다가 조기 치매 증상 오는 여캐 “너 왜 이렇게 살아..” 잔뜩 수척해진 친구의 손을 붙잡으며 여자가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줄곧 성실하고 긍정적이고 상냥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통보하던 날이 기억났다. 집안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 그리고 그 빚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 여자는 그게 매매혼과 뭐가 다르냐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질 못했다. 친구의 눈동자에 체념과 함께 결연함이 뒤엉켜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이것도 다 내 팔자지.” 친구의 손등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면서 또 다른 여자가 처연한 미소를 얼굴에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식 때 친구가 입었던 원피스를 칭찬함을 시작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머리를..
중력. Gravity. 지구가 내핵으로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 혹은 에너지에 일어나는 공간의 왜곡. 먼 옛날 영국의 한 과학자가 머리에 떨어진 사과를 보고 발견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과나 기타 과일과 전혀 상관없이 중력을 수학적으로 풀어냈을 뿐인 그 힘. 지금 중력에 의해 영롱하게 빛나던 아이스크림 세 덩이가 착실하게, 땅으로 추락했다. 날개 있는 이는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불행하게도 아이스크림에게는 날개 따윈 없었다. 드라마틱한 모습과 다르게 그 흔한 철퍽하는 소리도 없이 초콜릿, 체리,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이 잔디밭에 나뒹굴었다. 콘에 올라갔을 때만해도 완벽한 동그랗던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은 따뜻한 햇살에 금방 녹아 찌그러졌다. “아..아이...아이스크림.” 허망하게 참혹한 광경을 눈에 ..
“낙하지점 접근” 아이델라의 차분한 목소리가 인이어를 타고 귓가에 내려앉았다. 알겠다. 호레이쇼는 귀를 살짝 누른 채 답했다. 그리고 헬멧을 쓰기 전 숨을 고르고 있던 엠마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보색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눈이 시리고 눈물이 촉촉하게 고일 때까지 엠마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긴장되나? 노인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그럴 리가.” 씹어뱉듯이 답한 엠마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거짓말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누구나 이 정도 높이에서 천쪼가리 하나에 의지한 채 착지하는 상황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 1000 피트에는 낙하산을 펼쳐야할 거다. 그리고..”“네, 네. 알아요. 너무 일찍 펴면 타겟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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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학생AU 지클린데를 제외한 다른 환자가 없는 병실에는 이따금 흔들리는 커튼의 펄럭임과 책장 넘기는 소리만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평소에는 하나로 묶어 올렸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지클린데는 목뒤에 닿는 감촉이 어색했는지 손으로 뒷목을 매만지곤 했지만 침묵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개인실이 좋긴 하구나. 속으로 생각한 그녀가 간만의 고독을 만끽하려는 때.. “지크!” 다리 부러졌다며! 그 고요를 산산조각 부숴버리며 래리 로젠버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저리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핑크색 머리카락하며 노을을 머금은 눈동자. 붉은기가 도는 적갈색 머리카락인 본인도 나름 눈에 띄는 머리색인데 그의 옆에서는 보이지도 않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던 지클린데는 시니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lTZXOAtLB8 모니가 눈을 뜨니 짙푸른 하늘에 미처 귀가하지 못한 별들이 총총 박혀있는 풍경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쓰다듬는 바람이 머금은 짭조름함이 뒤 따랐다. 모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모래가 곱게 쌓여있고 잠든 세상을 깨울까 조심하는 파도가 장난스럽게 이를 흩어트려놓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으로 시선을 던지자 태양이 떠오르려고 하는지 붉은 기운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부분에서 분홍빛이 스며들어오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모니야!” 어디선가 목소리가 자기를 부르자 화들짝 놀란 모니는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선크림 발라야지!” 피부 탄다. 크림이 피부에 철퍽, 닿자 ..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기사는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갑주로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투구 아래로 보이는 아래턱이 단단하게 굳어있었고, 동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들키지 않길 바라며 살금살금 다가갔다. “지크.” 꼿꼿하게 서있는 기사를 폭 찌르며 내가 속삭였다. 근엄한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 가문 이름이 울겠지. 다시 한 번 지클린데를 찔렀다. 손가락 끝이 단단한 강철에 닿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느끼질 못하는 건가 싶어서 주먹으로라도 쳐야하나 싶던 찰나에, 방패가 매섭게 땅에 꽂히며 슬금 뻗어나가는 팔을 제지했다.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방패는 마치 삽처럼 흙바닥을 깊이 뚫었다. 일초만 늦었어도 손이 저기에서 나뒹굴 뻔했다는 생각에 소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