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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빚을 갚기 위해 정략혼으로 시집살이하다가 조기 치매 증상 오는 여캐




“너 왜 이렇게 살아..”


 잔뜩 수척해진 친구의 손을 붙잡으며 여자가 중얼거렸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줄곧 성실하고 긍정적이고 상냥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통보하던 날이 기억났다. 집안이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 그리고 그 빚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 여자는 그게 매매혼과 뭐가 다르냐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질 못했다. 친구의 눈동자에 체념과 함께 결연함이 뒤엉켜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이것도 다 내 팔자지.”


 친구의 손등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면서 또 다른 여자가 처연한 미소를 얼굴에 드러냈다. 그리고 자신의 결혼식 때 친구가 입었던 원피스를 칭찬함을 시작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틀었다. 친구는 할 말이 더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자의 거친 손을 한층 더 세게 잡으며 그녀의 의도대로 실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살아온 세월과 똑같은 기간이었고, 사악하지는 않지만 무관심한 남편과 함께 살고 결혼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치매증상에 시달리는 시어머니의 수발을 든 나날과 같은 기간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다는 점이 유일한, 아니 유이한 위안이었다. 여자는 곱게 차려입은 한복의 고름으로 눈가를 훔치며 화장실로 향했다. 오늘은 딸아이의 결혼식이니까 괜한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 여자를 쏙 빼닮은 딸아이는 무채색으로 이어지던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였다. 어느 날은 총천연색으로 반짝이고, 어느 날은 파스텔 톤으로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또 어느 날은 눈이 시릴 정도로 화사한 햇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딸이 그녀를 닮지 않은 것 한 가지가 있었다. 


 딸아이는 팔려가는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룰 거라는 점이다. 


 새하얀 타일로 이루어진 예식장의 화장실에 도착한 여자는 작은 파우치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꾹 눌렀다. 손수건의 진한 얼룩이 조금씩 커지다가 마는 걸 확인한 그녀는 뒤이어 작은 수첩을 꺼냈다. 장 볼 목록, 여러 가지 일정, 그리고 전화 번호 등이 빼곡하게 적혀있는 종이들을 뒤적이다가 원하는 걸 찾은 여자는 몇 번이고 그걸 되뇌였다. 오늘은 딸의 결혼식, 오후 1시. 요즘 자꾸만 기억을 어딘가에 흘리곤 했다. 전구의 필라멘트가 끊기듯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뚝.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얼마 전에는 자신의 이름마저 생각해내는데 한참동안 고민해서 어쩐지 불안함이 고개를 스멀스멀 들었다. 시어머니도 이랬다. 건망증이 심해졌다는 점에 불안해하며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며느리의 기억보다 자신의 듬성듬성한 기억을 신뢰하고 결국 자신이 무엇을 잊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어질 때까지.


 마지막으로 뭔가를 잊어버렸는지 뒤돌아보고 화장실을 나서려는 순간, 여자는 하얀 무언가에 살짝 부딪혔다. 당황한 나머지 손에서 파우치를 툭 떨어뜨리자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그걸 주워 손에 들려주었다. 어쩜 이리도 고울까. 우리 딸아이도 이런 옷을 입을 날이 오겠지? 

“고마워요, 아가씨.”


 여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딸이 소개해준 예비 사위를 생각했다. 숫기가 부족하고 조용한 남자였지만 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애정과 경외가 흘러넘치는 자였다. 아무리 서로가 존중해주어도 애정이 없는 결혼생활이 어떤지 아는 여자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딸은 행복할 것이다. 여자는 자기 앞에서 비키지 않는 신부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기다렸다. 치맛자락이 걸리기라도 한 걸까.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를 그렁그렁 매달고 있던 여자가 떨리는 입술로 속삭였다. 


“..엄마, 나야. 모르겠어?”


 그 순간, 뇌 안이 라디오 잡음으로 가득 차더니 수백, 아니 수만 개의 필라멘트가 한 번에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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