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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연금술사는 변덕스럽다.

 

어떤 날에는 서재에 몇날며칠동안 틀어박혀서 연구를 진행하고, 또 다른 날에는 몇 시간째 의자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늘어져있기도 한다. 엠마가 이 노인네가 앉은 채 죽은 게 아닌가하고-절대로 걱정되어 그런 게 아니고 시체를 치우고 싶지 않아서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확인할 때면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 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아침을 먹고 아이델라가 만든 공식을 한번 확인하고, 엠마에게는 새로운 과제를 내주었다. 그러다가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할 그 즈음, 서재에서 낡은 서류가방을 가져 온 호레이쇼가 얘기했다.

 

나갈 준비 하거라.”

 

그러면서 머리 위에 모자를 얹었다.

 

어디 가시게요?”

 

젊은 연금술사가 아주 상식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자 노인은 대답했다.

 

자네들, 밤낚시 가본 적 없지?”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다른 손으로는 엠마의 외투를 집어든 호레이쇼가 덧붙였다.

 

이 늙은이가 아는 호수가 있단다.”

 

열쇠를 돌리자 문이 확실하게 잠기는 소리와 함께 공방은 공중에 녹아들었다. 아마 주변 환경의 색과 질감을 모방하게끔 하는 약품을 페인트, 혹은 벽돌에 섞었으리라고 엠마는 생각했다. 왜 항상 열쇠는 본인만 가지고 있나. 우리를 믿지 못하는 건가. 14살의 엠마는 이내 그 가설을 철회했다. 혹시 모를까 약-보라색 병에 든 약은 손을 편안하게 하는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을 챙기는 걸 봤기 때문이다.

 

늙은 연금술사는 보기와 다르게 물렀다.

 

그리고 자신과 아이델라를 그 누구보다도 믿고 있었다. 다만 열쇠를 넘겨줄 시간이 안됐을 뿐.

 

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태양이 잠들고 달빛이 세상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풀이 서로 스치며 나는 소리와 곤충의 울음만이 남아있는 평화로운 광경에 마음이 누그러진 엠마는 잡고 있던 아이델라의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공중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눈으로 쫓기 시작했다. 물가 주변의 흙이 촉촉하고 시원한 기운을 머금은 채 소녀의 무게에 따라 같이 내려앉았다. 호레이쇼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뭔가를 퐁, 호수에 던졌다.

 

그리고 이내 그 무언가는 점점 물을 먹어 온전한 배가 되었다. 뗏목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몰랐지만 엠마는 2층짜리 뗏목을 본 적이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자 아이델라가 곁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걸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다니, 아이델라 언니는 대단해. 그 온기를 잡고 일어난 엠마는 뿌듯해 보이는-정말 얄밉다니까-호레이쇼에게 눈을 흘겼다.

 

이런 건 하기 전에 언질을 주란 말이야 할배.”

, 말을 하면 서프라이즈의 의미가 없지 않니.”

 

투덜거리는 어린 제자를 배 안으로 들여보낸 호레이쇼가 아이델라까지 태우고 지팡이로 땅을 밀었다. 미끄러지듯이 움직인 배는 호수 중앙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엠마는 감탄하는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게 무던히 애쓰며 배를 살펴보았다. 위로 올라간 건물은 단순해보였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모양이었다. 침대는 없었지만 몇 시간이고 앉아있어도 괜찮을 것처럼 푹신한 의자 여러 개에 간단한 실험까지도 할 수 있을 도구.

 

어떻게 가라앉지 않고도 이런 구조를 만들지?’

 

혼자만의 사념에 잠겨있던 엠마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호레이쇼와 눈이 마주쳤다. 이 할배가 생각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가슴께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오기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호레이쇼는 그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낚싯대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능숙한 손동작으로 바늘에 뭔가를 톡 꽂고 물에 퐁당,퐁당,퐁당 던진 후 하나씩 가리키더니 말했다.

 

이건 아이델라 자네 걸세. 저건 엠마 네 거다.”

 

그러고 나서 자기 가방으로 고갯짓을 한 연금술사가 말했다. 가방 밖에 달린 주머니에 약이 있을 거다. 아이델라, 속이 안 좋으면 그거 마시련. 엠마는 자기 몫의 낚시대를 손에 쥔 채 이리저리 흔들어봤다. 파문이 호수 표면 위로 일렁이다가 잠잠해졌다. 약을 다 마신 듯 한 아이델라가 다가와 엠마의 곁에 자리 잡았다. 아까보다 안색이 좋아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농장에서만 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하는 상상도 피어올랐다. 이렇게 잔잔한데도 멀미를 하는 사저를 바라보던 엠마는 이내 미동 없는 낚싯대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바라보면 나아질게다. 그 말을 한 호레이쇼가 자기 줄을 튕겼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생활의 지혜지.”

 

배가 아플 때에는 물을 너무 마시지 마라. 밥 사준다는 낯선 남자가 디저트까지 사준다고 할 때에는 도망가라. , 밥도 얻어먹으면 안된단다. 시덥지 않은 말을 하는 노인에게 엠마는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옆에서 눈을 반짝이는 아이델라는 굴하지 않았다.

 

그럼 선생님은 바다도 보셨나요?”

 

아마 이 능구렁이의 목적은 물고기가 아닐 테다. 말을 할 때마다 의외로 소리에 민감한 물고기들이 도망갈 가능성을 높이는데도 호레이쇼는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이 허공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래, 봤지. 바다는, 하늘과 또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더구나.”

 

모르는 사람은 둘 다 파란색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허허, 멋쩍은 미소를 흘린 호레이쇼가 이어 말했다.

 

물론 이 늙은이도 멀리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이다. 엠마는 확신했다. 언젠가 다들 잠들었다고 생각한 시간, 호레이쇼가 책을 펼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책안에는 하얗게 거품을 만들어내는 거친 파도와, 누군지 모를 남자들의 고함소리 그리고 눈밖에 보이지 않은 괴물-엠마는 나중에야 그 괴물의 이름이 고래라는 걸 배웠다-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호레이쇼는 이따금 예전을 추억하는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키가 큰 풀 사이에서 연주하는 귀뚜라미와 하늘을 수놓은 반딧불이와 별빛, 그리고 좋아하는 언니와 할배가 만든 풍경을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엠마, 저기에 있는 바구니를 갖다 주지 않을련? 사과파이도 가져왔단다.”

 

진짜, 기분 나쁠 정도로 잘 안다니까. 엠마는 제법 묵직한 바구니를 넘겨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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