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닌 클라우드 향 - “어, 미안. 내가 늦었다.” 다리 위를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 길을 나란히 걷는 일행에게 건네는 말소리, 공중에서 흩어지는 자동차 소리를 뚫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안토닌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사실 그는 목소리가 귓가에 닿기도 전에 이미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부드러운 섬유 유연제와 손에 들고 있는 커피의 향에도 전부 가려지지 않은, 피비린내. 본능에 따라서 피를 마시고, 그렇기 때문에 처연한 존재들의 냄새. 훈은 오른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다른 손은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느긋하게 걸어갔다. 친구와의 약속에 5분 늦은 것 마냥 미안함과 가벼움이 적당하게 섞인 미소였다. 사실 영원을 사는 ..
로버트는 공중에 떠다니는 촛불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에 실을 매단 것도 아닌데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건 마법 때문이겠지? 집에서도 딱히 마법을 자주 사용하지 않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호기심에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꾸욱 억눌렀다. 착한 아이는 그러지 않을 거니까. 어머니가 마법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시작한 지 일 년도 안 되었을 때, 부엉이 한 마리가 집으로 와 편지를 주고 갔다. 로버트랑 놀고 있던 에밀리는 꺄륵하고 소리를 치며 살랑거리는 날개를 만지기 위해 오동통한 손을 내밀었고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로버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겨울 이불 안에 있는 깃털보다 부드럽다고 감탄하던 에밀리의 볼이 둥그스름하게 밝아졌다. 아이들이 창틀에 앉아 자신의 날개를 부리로 매만지는 ..
주변이 온통 빛으로 차있는데도 이렇게 절망스러울 수 있구나. 로버트 그레이엄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핀더파이어, 악마의 화염은 기이할 정도로 큰 불덩이를 토해냈다가 이내 불로 된 짐승으로 모습을 변모하고 있었다. 뱀처럼 벽을 길게 훑어가는 모습도, 불꽃으로 만들어진 용이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모습도 보고 있던 로버트는 문득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궜다. 아. 그제야 망토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그는 가벼운 손놀림으로 망토를 벗어냈다. 어차피 소용도 없는 것. 핀더파이어에 닿은 것은 무조건 재로 돌아간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붉은 꽃. 물방울 하나가 또르륵 떨어지자 그는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비볐다.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워서 그런가보다. 아무도..
#자캐가_버려진_감정과_기억을_모아_보석으로_만드는_보석상의_주인이라면 가게 안은 교회에서 보던 스테인드글레스 같았다. 물로 그것보다는 작은 빛깔이었지만 소년은 교회보다도 훨씬 예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그 가게에 갔을 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만들어진 조각들이나, 정교하면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보석들을 보고 가게주인분은 얼마나 예쁜 분이실까 착각하기도 했다. 정작 주인이 되는 사람은 새빨간 머리에 인상을 쓰는 아저씨였지만 말이다. 항상 불퉁한 목소리로 적당히 하라고 하지만 사실은 구경도 시켜주는 아저씨. 달그락 유리로 만들어진 긴 막대끼리 살짝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조금 움찔한 소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스럽게도 태혁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했다. 붉은 머리 아래로는 집중하느라 구부린 ..
비닐을 뜯자 누가바의 기다란 모습이 드러났다. 나무 막대의 감촉과 아이스크림 자체에서 나는 냉기를 즐기면서 그는 그것을 입에 머금었다. 원래라면 이빨로 조금씩 갉아먹거나 깨물어먹었을 테지만 지금 손에 들린 것은 그렇게 먹을 수가 없다. 깨물면 이빨이 상할 거라는 강한 예감을 느끼며 그는 끝부분부터 녹이기 시작했다. 입안이 냉기로 얼얼해지기 시작하자 그는 조금이라도 냉기를 분산시키려고 입을 크게 벌려 아이스크림 전체를 입안 깊숙이 집어넣었다. 뜨거운 입안에 들어오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혀로 밑동을 돌려가면서 핥은 그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천천히 나무막대를 잡아당겼다. 차가우면서도 딱딱한 감촉이 앞니를 자극하자 조금 어깨를 움츠렸다. 다 꺼내서 보니 정성들여 녹인 앞부분은 이미 많이 녹아서 하얀 속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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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으로 눈을 찌푸리며 대니얼은 자신의 아랫배를 바라봤다. 너무 한가하게 지내왔던 탓일까. 뒤에서 다가오는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해버렸다. 자신에게 칼을 겨눈 그 사람은 숲을 혼자 다니는 여행객들의 뒤를 노리는 강도인 듯했다. 하찮은 좀도둑이라는 건 단검이 등을 파고들었음에도 저항하고 견딘 대니얼을 보고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리던 남자의 동공에서 알 수 있었다. 경험도 부족한지 망토에 가려졌던 대니얼의 체격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기도 했고. 아마 칼에 찔리고도 거세게 저항하는 사람을 본 적이 지금까지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 위협하기만 해도 창백해지면서 투항하니. 하지만 대니얼은 누구를 해치기 위해 어떤 각오가 필요한지 아는 사람이었고, 그 남자는, 비록 칼을 들고 타인을 해치려고 했어도, 그걸 모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