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차/하루 하나

카레

잡초양 2017. 7. 23. 23:49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기척을 감지한 센서가 팍, 하고 전등을 켰다. 아래로 내리쬐는 불빛이 신발을 벗기 위해 허리를 숙인 지성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오늘 낮에 카레 관련 요리서적을 쳐다보던 남자가 생각났다. 카레요리 100선이었나, 카레로 만드는 요리 100가지였나. 책 제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카레에 대한 열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인사하던 청년의 이름은 또렷하게 생각났다. 리브겔트. 


 하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기 때문이었을까 지성은 그 날 저녁을 카레로 아주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두고두고 먹을 수 있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 찬거리로 묵직해진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기중에 가라앉았다. 문지방을 넘고 집안으로 들어간 지성은 제복 코트부터 벗어서 의자에 걸어두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이 손목을 타고 흐르기 직전까지 적신 그는 비누를 양손으로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펌핑해서 거품까지 만들어내는 비누가 있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구시대적인 비누 쪽이 더 마음에 드는 그였다. 미끌거리는 비누기까지 뽀독뽀독 닦아낸 지성은 비닐봉지 안에 있던 계란 한판과 카레가루가 든 봉지를 꺼냈다. 양팔을 걷은 그가 안경을 벗고 부엌에서 심호흡을 깊게 내쉬었다. 


 요리에 능하다고 할 수 없지만 언제나 먹던 일상적인 카레보다는 새로운 게 먹고 싶어져서 레시피까지 검색해봤다. 삶은 달걀을 넣은 카레라니, 쉬우면서도 독특하겠지? 지성은 계란을 두어 개 짚었다가 끓는 물에 계란 한판을 모조리 다 집어넣었다. 


“어차피 다 먹을 테니까.”


 혼자 중얼거린 그가 자기 합리화했다. 중간에 딴 짓을 해서 깨진 계란 껍데기 사이로 흰자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점이 아쉬웠지만 잘 익은 삶은 달걀 서른 개를 촘촘하게 미끈한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악!”


 물기를 빼지 않은 채 올려놓은 터라 기름이 이리저리 튀기기 시작했다. 당황한 지성은 옆에 놓고 있던 프라이팬에 뚜껑을 덮어두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하하,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그는 잠시 시간을 기다렸다가 계란을 뒤집었다. 노릇하게 익은 면이 판판하게 눌려있는 걸 확인하고 조금 자신감을 회복한 지성은 반대편이 익을 동안 물을 붓고 카레가루를 솔솔 뿌렸다. 나중에 양을 늘릴 때 물을 더 넣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카레봉지를 통째로 털어 넣자 걸쭉하고 짙은 노란색을 띠었다.


“팬이 커서 다행이네.”


 일주일은 족히 먹을 분량을 만든 후 양 손을 허리에 올린 지성이 접시에 하얀 밥을 퍼서 넓게 폈다. 국자로 카레를 밥 위에 뿌린 그는 제법 먹음직스러운 빛깔에 만족하며 식탁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을 인사말을 하고 난 후 숟가락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달걀 두 개를 반쪽 낸 그가 입에 넣고 우물거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짜.”



'1차 > 하루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MUSS  (0) 2017.07.26
Behind the scenes  (0) 2017.07.24
미묘하게 엇갈린 사이  (0) 2017.07.22
뱀파이어와 그 동거인  (0) 2017.07.21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사만다 스튜어트는  (0) 2017.07.21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