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지점 접근” 아이델라의 차분한 목소리가 인이어를 타고 귓가에 내려앉았다. 알겠다. 호레이쇼는 귀를 살짝 누른 채 답했다. 그리고 헬멧을 쓰기 전 숨을 고르고 있던 엠마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보색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눈이 시리고 눈물이 촉촉하게 고일 때까지 엠마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긴장되나? 노인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그럴 리가.” 씹어뱉듯이 답한 엠마는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거짓말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누구나 이 정도 높이에서 천쪼가리 하나에 의지한 채 착지하는 상황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 1000 피트에는 낙하산을 펼쳐야할 거다. 그리고..”“네, 네. 알아요. 너무 일찍 펴면 타겟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높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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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학생AU 지클린데를 제외한 다른 환자가 없는 병실에는 이따금 흔들리는 커튼의 펄럭임과 책장 넘기는 소리만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평소에는 하나로 묶어 올렸을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지클린데는 목뒤에 닿는 감촉이 어색했는지 손으로 뒷목을 매만지곤 했지만 침묵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개인실이 좋긴 하구나. 속으로 생각한 그녀가 간만의 고독을 만끽하려는 때.. “지크!” 다리 부러졌다며! 그 고요를 산산조각 부숴버리며 래리 로젠버그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저리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핑크색 머리카락하며 노을을 머금은 눈동자. 붉은기가 도는 적갈색 머리카락인 본인도 나름 눈에 띄는 머리색인데 그의 옆에서는 보이지도 않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던 지클린데는 시니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lTZXOAtLB8 모니가 눈을 뜨니 짙푸른 하늘에 미처 귀가하지 못한 별들이 총총 박혀있는 풍경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얼굴을 쓰다듬는 바람이 머금은 짭조름함이 뒤 따랐다. 모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모래가 곱게 쌓여있고 잠든 세상을 깨울까 조심하는 파도가 장난스럽게 이를 흩어트려놓고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으로 시선을 던지자 태양이 떠오르려고 하는지 붉은 기운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었다. 바다와 맞닿은 부분에서 분홍빛이 스며들어오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모니야!” 어디선가 목소리가 자기를 부르자 화들짝 놀란 모니는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선크림 발라야지!” 피부 탄다. 크림이 피부에 철퍽, 닿자 ..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기사는 틈 하나 보이지 않는 갑주로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투구 아래로 보이는 아래턱이 단단하게 굳어있었고, 동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들키지 않길 바라며 살금살금 다가갔다. “지크.” 꼿꼿하게 서있는 기사를 폭 찌르며 내가 속삭였다. 근엄한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 가문 이름이 울겠지. 다시 한 번 지클린데를 찔렀다. 손가락 끝이 단단한 강철에 닿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느끼질 못하는 건가 싶어서 주먹으로라도 쳐야하나 싶던 찰나에, 방패가 매섭게 땅에 꽂히며 슬금 뻗어나가는 팔을 제지했다.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방패는 마치 삽처럼 흙바닥을 깊이 뚫었다. 일초만 늦었어도 손이 저기에서 나뒹굴 뻔했다는 생각에 소름..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눈송이들이 정신을 들게 했다. 복부를 꿰뚫은 나뭇조각을 제거한 후 기절해버린 모양인지 나는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눈밭에서 겨우 눈을 떴다. 여기에서 잠들면 죽어버릴 것 같은 예감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격통에 비명만 나왔다. “으윽..!” 허튼 짓을 하면 상처가 더 벌어질까봐 포기하고 한 손을 배에 올려놓고 힘껏 눌렀다. 작디작은 얼음 꽃에 피가 번지는 모양새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홍빛 꽃잎이네. 입을 벌리자 입술에서 피어난 하얀 연기가 공중에서 흩어졌다. 지금 내 꼴을 본다면 넌 미간을 찡그리며 그러게 항상 덤벼든다고 좋은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라고 말할 테지. 날카롭게 빛나는 금색 눈, 바람에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한심하다는 ..
“들여보내라.” 에켈이 보낸 관리이거니 생각하고 대답한 어셔는 딱 보기에도 관리처럼 생기지 않은 남자와 마주했다. 가지런히 넘긴 머리카락도 아침마다 정리했을 수염도 먼지 한 톨 없는 정장도 깔끔했지만 공무원 특유의 단정함과는 동떨어져있는 분위기가 이질적이었다. 남자는 살짝 고개를 까딱이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제자를 찾으러 왔다.” 아이델라 프랑델로하 말하는 건가. 무심한 고개를 들어 녹음이 맴도는 눈동자를 바라봤다. 부채꼴로 접히는 주름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동공을 감싼 연둣빛 시선에는 꺼내지 않은 말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노인이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어셔도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선전포고를 끝으로 연배 지긋한 남자는 머리에 얹은 모자를 살짝 들며 인사한..
학처럼 목을 잔뜩 뺀 채 고개를 숙인 노인이 니퍼를 쥔 손목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단안경을 잠시 매만지더니 이번에는 옆에 놓은 망치로 빛덩어리를 한 번, 두 번, 세 번, 약하게 두들겼다. 이윽고 눈부실 정도의 빛무리가 서서히 형태를 갖추었다. 빛이 투명한 녹색의 돌 안으로 다 들어가고 나서야 남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안경을 벗어 작업대 위에 놓았다. 이런저런 디자인을 담은 스케치 종이 다발, 아직 완성하지 못한 작품들, 핫초코든 커피든 언젠가는 달콤한 음료를 담았을법한 컵 서너 개 그리고 금속을 구부리고 비틀고, 두들기기 위한 도구들. 호레이쇼 스탈링의 작업대는 빈말로라도 단정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용케 자기가 써야하는 물건들을 찾을 수 있는지 노인은 한 번도 정리정돈을 해야겠다는 움직..
*심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고어 주의. 머리가 박살납니다.* “심심해!” 허공을 걷어차는 다리에 의해 치맛자락이 부웅하고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검은 머리카락이 뒤로 공중에 흩뿌려졌다. “어제 사냥도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옆에 서있던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마법사들로만 데리고 왔는데 말이죠. 주군은 시끄럽게 소리만 지리는 사냥감이나 공포에 덜덜 떨고만 있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학살보다는 더 재미있게, 더 스릴 넘치게. 변덕스럽고 잔혹한 마왕은 반항하는 상대의 앞에서 희망을 흔들다가 산산조각 내는 걸 즐겼다. 그런 의미에서 자존심 높은 마법사들이 적당한 장난감이라고 훈은 생각했었다. 안타깝게도 모니는 금방 싫증내고 말았지만. 공기 중에서 양피지와 펜..
"웬일로 말이 없나요 스튜어트씨?" 평소라면 지겹다거나 먼저 죽이라고 하셨을 텐데 말이에요? 사만다 스튜어트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다가 한 박자 늦게, 제법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여름처럼 싱그러운 녹색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다. 많은 사람들이 클로이 에반스를 언급할 때 타오르는 듯 한 그 주홍빛 머리카락을 먼저 꼽는다. 사만다에게는 중요치 않았지만. 머리카락은 다른 색을 입힐 수도, 길이가 짧아질 수도, 심지어는 가발로도 가릴 수 있다. 하지만 눈은, 떨리는 눈꺼풀도, 흔들리는 동공도, 방황하는 시선도 숨길 수 없는 눈은, 변하지 않는다. 강산이 몇 번이고 변한 세월동안에도 바뀌지 않은, 메마른 잎사귀를 품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사만다에게는 안에 머금은 감정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