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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하루 하나

2019.03.06

잡초양 2019. 3. 7. 00:10

나는 언제나 1등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머리가 좋다는 칭찬은 질릴 만큼 많이 듣고 내신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중학교 때부터 1등은 도맡아놓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어? 학원은 어디 다녀? 혹시 개인 과외해? 그리고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단골 질문들에는 늘 비슷한 대답이 내뱉었다.

 

혼자서도 열심히 하는데.. 이번에는 운이 좋았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린 채 대답하면 모두들 허탈함과 납득이 뒤엉킨 반응을 보이곤 했다. 이런 게 자기 주도적 학습이야? 희연이는 대단하네. 그러면 나는 최대한 둥근 이미지를 유지하며 뒷말을 삼켰다. 나만큼 하지도 않았으면서 같은 결과를 바라면 염치도 없는 거 아니야? 수업 시간에는 무조건 집중하고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자투리 공부, 방과 후에는 곧장 복습부터. 그렇게 숨 가쁘게 뛴 덕에 받은 완벽한 성적표는 곧 명문 사립 고등학교 입학으로 이어졌다. 산속에 있어서 한동안 기숙사에서 살아야한다는 게 흠이었지만 여고인데다가 대학까지 같은 재단소속인 학교였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면 자기 등수에 1.5는 곱해야한다던데.. 좀 더 긴장해야지. 입학생 대표로 선서를 읊고 단상에 내려오면서 나는 다짐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는 1등을 차지했다. 전교 1등부터 30등까지 반과 이름이 줄줄이 적혀있는 종이를 보면서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에 잔뜩 힘을 주고 작은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유화를 그리다가 실수한 부분위에 물감을 얹듯이, 불안감에 이리저리 방황하던 눈동자는 여유로운 눈웃음으로, 자기도 모르게 뜯기던 입술은 부드러운 호선으로 덧칠했다. 앞으로 이정도만 유지하면 학업우수자 전형은 물론이고, 어쩌면 장학금까지도 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1등할 각오로 공부했는데..’

 

분명, 그랬을 터다.

 

근데 왜 내 이름이 제일 위가 아니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이번에는 희연이가 1등이 아니네?”

조찬희? 걔 누구야?”

이번에 새로 전학 온 애. 이희연네 반이래.”

 

그럼 쟤한테 라이벌 생긴 거야?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데도 1학년 4반 이희연 옆에 선명하게 인쇄된 숫자 2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가까스로 눈을 깜빡, 감았다가 뜨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는 중간 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교실 저 멀리 뒤쪽에서 엎드려 자고 있는 검은 뒤통수를 잠깐, 아주 잠깐 보고는 제자리에 앉았다. 조찬희. 1학기 중간에 전학 온 이상한 학생이었다. 매교시마다 자고 있는데도 선생님들이 기습적으로 물어오는 질문에는 한 번도 당한 적이 없고, 체육시간은 물론, 음악시간과 미술시간에도 무기력하게 졸다가 지적당하기 일쑤고.

 

.. 내 라이벌..’

 

꽉 다물린 턱에서 이빨끼리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교과서를 펴고 필사적으로 글씨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그래, 이번에는 컨디션이 안 좋았을 뿐이야. 다음 학기에는 다시 1등 할 수 있어. 방학식이 이렇게 기다려지던 적은 처음이었다.

 

여름방학의 설렘이 채 지나기도 전에 중간고사가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매번 그랬듯이 시험성적이 하얀 종이에 인쇄되어 벽이 붙었다.

 

이번에도 2등이네? .. 물론 2등도 대단하지만!”

아니야, 상은아. 그냥 운이 좋은 거지.”

 

반사적으로 웃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기대에 한참 어긋난 성적을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여전히 이희연 옆에 인쇄된 숫자는 1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조찬희는 하루 종일 자는데도 1등이네.. 너무 레벨 차이가 크니까 맥 빠진다.”

 

누군가가 허탈한 한숨마냥 픽, 말하자 순간 뜨거운 짜증이 식도를 긁으며 역류했다. 복도에서 보이는, 늘 그렇듯이 책상위에 엎드려 있는 검은 단발머리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어깨를 파고드는 가방끈을 관절이 하얘질 정도로 꽉 잡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학생들,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학생들을 거슬러 올라간 나는 마침내 음악실 표지판이 보이는 층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관심 없으면 겉모습에 주목한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악기 창고가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되는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문을 단단하게 잠근 것처럼 보이는 쇠사슬과 자물쇠를 한손으로 풀자 나만 아는 작은 공간이 열렸다.

 

나사 빠진 악보대 몇 개 사이에 널브러진 기타들, 왜 악기창고에 있는지 모를 책장 두 개, 그리고 그 사이에 달려있는 작은 창문. 운동장에 내려다보이는 그 창문 바로 앞에 앉고 책장의 둥근 모서리에 고개를 툭, 기댔다.

 

네모난 쿠기틀로 잘라놓은 듯이 깔끔한 하늘과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순, 찌그러졌다가 흐릿하게 번졌다. 괜히 뜨거워지는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자 물기가 묻어났다. 짜증나. 훌쩍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아무도 안 듣는데 뭐.

 

난 이렇게 노력하는데.”

 

하루 종일 자는 애랑 다르게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쓰고 외우고 푸는데. 계산 실수로 수학문제를 틀릴 때나 말장난으로 객관식 문제를 틀릴 때도 이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손 안에 바스락거리는 시험지를 내려놓고는 한동안 고개를 팔에 파묻었다.

 

결국 저녁까지 거기에 틀어박혀서 공부했다.

 

1층으로 내려오자 어느새 석양이 길게 뻗어 세상을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귀가할 수 있다는 점이지. 가서도 기숙사생 전용 열람실이 있고. 나는 작게 웃으며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고 실내화를 집어넣었다. 페이지에 동그라미가 그려질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나도 한심하지만.

 

지금 가?”

 

자다가 일어난 듯한, 끝이 늘어지는 말투의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슬아슬하게 눈을 찌를 정도의-답답하지도 않나봐-앞머리에 목 중간까지 오는 머리카락, 그리고 이상할만치 기뻐보이는 미소가 보였다.

 

, 안녕 찬희야.”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높은 우등생의 얼굴로 채 가다듬기도 전에 내가 답했다. 지금 기숙사 가려고. 너는? 조찬희는 부담스럽게도 그 맹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리고 입술을 뻐끔 벌려 말했다.

 

, 기다렸어.”

?”

 

동그란 안경테 너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나는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동자는 미묘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에 담긴 모범생이희연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본심이 입술사이에서 쏟아냈다.

 

비웃으려고? 넌 잠이나 자는데도 술술 문제가 풀리니까? 그냥 설렁설렁 지내기만 하면 되니까? 지금까지 나는! 내가 이룬 건 다 노력의 결과야! 너한테 비웃음 당할 이유가 없다고!”

 

널 이길 거야. 수치심과 분노가 엉켜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검은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왜 자꾸만 알짱대는 거야. 짜증나게!”

 

그 순간, 조찬희는 내 양손을 잡더니 벌떡 얼굴을 들고는 웃었다.

 

. 날 이겨줘.”

 

그리고 내 손에 얼굴을 가져다대고는 영문 모를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 턱까지 쫓아와서 안달 나게 해줘. 불안하게 만들어줘. 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날 밟아버리는 거야. 안경 렌즈 때문인지 형광등 불빛때문인지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끝까지 쫓아와.”

 

아주 드문 일이었지만 자고 있지 않을 때 조찬희는 혼자 콧노래를 부르거나 중얼거리면서 정원에 앉아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 하던 눈이랑 비슷하다. 역시, 그때부터 알아봤었어야했지만, 조찬희는 진짜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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