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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럿이 아니라서.. 사실 윥과 워누의 얼굴만 알아요...ㅋㅋㅋ하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윥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림 주의. 애매함 주의
“나 형 좋아해요.”
원우가 고백했다. 너무 많은 말들은 감정을 희석시키고 너무 적은 말은 모든 걸 담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해서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정한은 그런 원우를 말없이 바라봤다. 자기 감정에 대한 확신과 그대로 부딪히는 용기. 투명한 안경알 너머의 시선은 흔들림 없었다. 아마 자기가 살아있었더라면 그 눈빛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올곧고, 바른 눈빛이었다. 하지만 정한은 또한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좋아한다는 말 이후에 어떤 말이 나올 것을 모를 리가 없지만, 그 뒷말까지 듣기에는 너무 의지가 약했다. 고맙다고 자기도 예전부터 좋아했고 아직도 좋아한다고 울면서 대답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끊어야한다. 더군다나, 자기가 어떻게 된 건지 알면 그 고백도 철회하지 않을까 싶은 의심도 들었다. 입 안이 쓰다. 남의 마음을 함부로 의심하는 자신에게 환멸이 든다. 마치 푸르른 양상추에 물기 많은 토마토와 흐물흐물하게 구워진 베이컨이 들어간 호밀 샌드위치를 먹은 느낌. 상상하니까 더 메스꺼워졌다. 혓바닥에 닿는 수분이랑 이빨 사이에 끼는 섬유질, 토스트의 뻣뻣한 촉감까지. 토할 것만 같아서 정한은 얼굴에 쓴 마스크를 더 올려 쓰고 고개를 살짝 까딱인 후 돌아섰다. 부디 원우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보지 못했기를 빌면서.
낫지 않았을 리가 없는 상처가 욱씬거리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팔의 통증이 둔탁하게 울릴 때마다 정한은 그 날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그 날은 평소와 다른 길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실수였다. 팔을 긁는 날카로움과 뜨끈한 혈향, 눈앞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의식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떠보니 자기는 죽어있었다.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튕겨나가 어딘지도 모를 곳에 나뒹구는 스스로를 가여워할 새도 없었다.
죽음을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으면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정한은 대답을 망설이다가 고운 눈매를 조금 찡그리며 생각에 잠길 것이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알았다고 대답할 테다. 그렇게 그는 흐르지 않는 혈류, 뛰지 않는 심장, 그리고 회색으로 퇴색한 세상을 보고 알게 되었다. 자신은 죽었음을.
물론 움직이는 시체에 불과한 자신에게 본능이라는 것이 남아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 “사건”이후 정한의 생활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 복사빛이 돌던 피부는 창백하게 새어버리고 건강한 갈색 머리카락은 백금발로 색이 빠져버렸다. 식사를 시도 해봐도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곤죽이 역겹게 식도를 할퀴었다. 그리고 심장소리가 사라진 대신 귀를 찢을 듯 한 침묵이 자리잡았다. 심장소리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자기 주변이 이렇게 고요한 줄 미처 몰랐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은 고독. 티비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던 귀신들이 왜 그렇게 공격적인지 이해되었다. 그들은 외로워서, 너무 외로워서 접촉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증오마저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래서 원우의 마음을 거절해야했다. 이미 시간이 멈춰버린 자신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원우. 자기 이기심 때문에 그의 발목을 잡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벚꽃이 가득한 풍경도, 푸르른 하늘도 정한에게는 무채색의 덩어리들로 보일 뿐이었다. 얼굴을 반 이상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땅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다니느라 이를 눈에 담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자기에 일어난 비현실적인 일과 달리 다른 이들은 하루하루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다. 과제가 많다고 속상해하거나 이번 주 주말에 소개팅을 간다고 자랑하거나 친구들과 같이 술 먹으러 가자고 약속한다든지.
불행 중의 다행이라면 정한은 이제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일상을 그리워하거나 이에 슬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죽음의 영향이 아닐까 예상해보지만 사실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았다. 정한은 누가 자기에게 말을 걸까봐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이내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정한이 형.”
같이 가요. 어제의 고백을 잊어버린 양 원우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시체도 시력이 나빠질 수 있나? 그의 주변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아서 정한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살짝 부볐다. 눈매를 가늘게 만든 원우는 정한의 경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오늘 같이 점심 먹을래요? 신호등만 건너면 맛있는 가게 있어요.
그 밝은 미소에 미동도 않던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