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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령은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아 본체의 전원을 눌렀다. 기계에 불이 들어오면서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치에는 치즈가 놀아달라고 다리에 몸을 비비면서 애처로운 소리를 흘렸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에 실린 어리광을 감지한 이령이 허리를 숙여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팔에 얹힌 묵직함과 따뜻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손으로는 고양이의 쫑긋한 귀 뒤쪽을 긁어주고 다른 손으로는 마우스를 쥐어 포털에 접속했다. 느긋한 오후의 햇살은 커튼 틈새로 새어 들어와 공기를 따뜻하게 덥혔다.
여유로움을 한껏 즐기며 그는 모니터 위를 지나가는 기사들을 가볍게 훑었다. 어렸을 때부터 왼쪽으로만 보는 데에 익숙해졌기에 치즈를 쓰다듬는 손길만큼이나 화면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익숙했다. 결국 별달리 흥미로운 걸 보지 못한 채 다시 처음의 포털 사이트로 돌아와 창을 끄기 직전, 이령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광고 배너를 가득 채우는 글씨가 이령의 눈동자에 비쳤고 입꼬리는 얇은 호선을 그렸다.
“병하.”
이리 와봐. 이령의 검은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병하는 자신을 부르는 동거인의 목소리에 괜히 들킨 것 같아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입니까. 입술을 열자 머리카락만큼이나 차분한 어투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거 봐. 이령이 동거인의 옷자락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병하가 다가오자 치즈는 이령의 품에서 가볍게 뛰어내렸고 고양이답게 소리 없이 착지했다. 소매를 붙잡은 손길에 병하는 치즈로부터 시선을 떼고 화면에 고정시켰다. 오소리, 어쩌면 너구리일지도 모르겠다,를 닮은 동물들을 마스코트로 내세우는 놀이공원이 이벤트 행사를 한다는 광고였다. 병신년을 맞이해서 이름에 병이나 신이 들어간 사람은 입장 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글을 읽으면서 병하는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광고를 꼼꼼히 살펴본 그는 눈을 들어 이령과 마주봤다. 이령의 붉은 시선에는 기대감이 넘실거리면서 빛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뜯기 직전의 아이마냥 반짝이는 눈빛에 병하는 살짝 주춤했다. 앉아있던 이령은 그런 병하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활짝 웃었다.
“가자!”
병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면서 시원한 벽안이 드러났다.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까.”
***
놀이공원은 언제나와 같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로와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나들이를 하는 연인들, 신이 나서 까르륵 웃는 어린아이, 그런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손을 꼭 잡은 부모들까지. 병하는 뒤통수의 바다 한 가운데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본 적이 드문 그로서는 걱정되면서도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손목에는 자유 이용권 팔찌가 얌전하게 걸려있었다. 밝은 노란색의 얇은 팔찌를 보여주면 모든 기구들을 탈 수 있다는 것 같다. 신기했다. 시계와는 다른 낯선 촉감에 병하는 자유이용권을 살짝 만져봤다.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것이 플라스틱을 닮아 있었다. 어쩌면 정말 플라스틱을 얇게 저민 것일 수도. 한참동안 관찰하던 그였지만 뒤따라 입장한 이령이 자신의 등을 톡 치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팔을 내렸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기다리던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병하는 벌써 조금 지친 듯 한 이령을 바라보며 물어봤다. 이령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들이 많아서. 미안. 대수롭지 않게 가벼운 사과를 던지고는 이령이 손을 내밀었다. 자신과 똑같은 팔찌가 손목에 걸려있었다. 손을 잡자는 의미로 내민 그 몸짓이 묘하게 부끄러워서 병하는 눈치 채지 못한 척 그 손을 무시한 채 사람들 틈 사이로 걸어갔다. 가죠. 그렇게 앞장서는 남색 머리카락을 보던 이령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며 뾰루뚱한 얼굴로 뒤따랐다. 금세 거리를 좁힌 이령이 병하의 어깨를 조금 세게 치고는 추월했다.
“부끄러워하기는.”
멍하니 상황 파악을 하는 그를 향해 뒤돌아본 이령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
“야, 너 괜찮아?”
창백하게 질린 병하를 바라보며 이령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머리에 각각 토끼와 고양이 머리띠를 한 성인 남자 둘이서 벤치에 꼬옥 붙어앉아있는 모습이 이목을 주목시킬만했지만 둘 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병하가 멀미로 인해 머리가 울리는 통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젖히니 머리의 움직임을 따라 토끼 귀가 살랑거렸다. 이령은 머리띠의 그 보송보송함과 대비될 정도로 푸석한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옆에서 이령이 안절부절못할 동안 조금 진정되었는지 슬그머니 눈을 뜬 병하는 시야 안에 가득 찬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쳐다봤다.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고양이 귀는 머리카락과 비슷한 빛깔로 처음부터 달려있던 거라고 착각할만했다. 평소에도 마이페이스인 성격과 꽤 닮아있다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이령의 시선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음을 그제야 인지했다. 붉은 색과 푸른 색. 전혀 달라 보이는 눈동자였지만 두 눈에 넘실거리는 감정을 같았다.
온전히 자신을 담고 있고, 걱정해주는 모습에 가슴께가 간질였다. 그 간질거림에 괜히 부끄러워져서 눈동자를 굴려 다른 곳을 바라봤다. 무안함에 볼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제가 안 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투덜거리는 병하의 모습에 이령은 괜히 걱정했다면서 장난스럽게 그를 툭 쳤다. 말대꾸할 기운도 있는 걸 보니 이제 괜찮나 보네. 그리고는 잠시 시선을 들어 올려 놀이공원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관람차를 살폈다.
“저거!”
저거 타자! 자기 소매를 잡아당기며 이령이 쭉 뻗은 손가락 끝에 걸려있는 관람차를 보고 병하는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네덜란드 튤립밭에서 볼 법한 풍차를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바퀴에 성냥갑같이 작은 칸들이 규칙적으로 달려있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남자 둘이 무슨 관람찹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따라오는 병하의 배려에 이령은 괜시리 웃음이 새어나왔다.
꽤 많은 사람들이 줄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우니 차례는 금방 왔다. 연인과의 낭만적인 추억을 만들기 위해, 어린 딸에게 더 높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친구들끼리 멋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다들 제각기의 이유가 있었지만 모두의 행동, 목소리, 표정에서 기대감이 잔뜩 배어있었다. 마침내 작은 칸이 둘 앞에 멈춰 섰다. 얇은 철제문을 열어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직원의 말과 함께 모든 소리가 끊겼다. 크다고 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둘이 있기에는 여유로운 관람차 칸에는 이령과, 병하로 가득 찼다.
조금씩 올라가면서 창문 밖으로 눈높이가 상승했다. 높이에 따라 변하는 풍경이 이령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비쳤다. 밤이 놀이공원에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켜지는 불빛이 잠잠한 어둠을 수놓는 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겨 넣은 이령의 뒷모습을 병하가 흐뭇하게 바라봤다. 앙증맞은 고양이 귀가 뒤통수에서 나온 모습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마저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귀여운 사람.
그 순간, 멍하니 이령을 보고 있던 병하는 관람차와 허공을 나누는, 그 작은 유리창에 비친 붉고 푸른 시선과 마주쳤다.
야경에 힘입어 한 층 더 그윽해진 눈매가 일순 병하와 부딪히더니 이내 웃음을 가득 머금어 곱게 휘었다. 그 싱그러운 모습을 보고 홀린 듯이 다가간 그는 이령의 어깨를 살며시 쥐고 몸을 돌리게 했다. 무슨 일이냐는 듯이 의문 섞인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 귀여운 사람.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부드럽게 쓸어내리면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관람차의 미세한 진동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피어오르면서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 전에, 이령이 뭐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병하는 살짝 벌어져서 촉촉한 입술을 훔쳤다. 새털같이 가벼운 입맞춤 후에 병하는 수줍음을 가리기 위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방금 뭐가 닿은 거지? 소리도 없이 살짝 붙었다가 떨어진 입술의 감각에 이령은 어리둥절해할 수 밖에 없었다. 순간 이것이 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는 손가락 끝을 입술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평소와 비슷한 듯 다른 입술에서 서서히 스며들어오는 온기에 이령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마음에 활짝 웃었다. 눈매가 접히고 입술이 벌어지면서 고른 치열까지 보이는 눈부신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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