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자캐

아즐란과 로즈

잡초양 2018. 5. 30. 12:02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눈송이들이 정신을 들게 했다. 복부를 꿰뚫은 나뭇조각을 제거한 후 기절해버린 모양인지 나는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눈밭에서 겨우 눈을 떴다. 여기에서 잠들면 죽어버릴 것 같은 예감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격통에 비명만 나왔다.


“으윽..!”


 허튼 짓을 하면 상처가 더 벌어질까봐 포기하고 한 손을 배에 올려놓고 힘껏 눌렀다. 작디작은 얼음 꽃에 피가 번지는 모양새가 제법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홍빛 꽃잎이네. 입을 벌리자 입술에서 피어난 하얀 연기가 공중에서 흩어졌다. 지금 내 꼴을 본다면 넌 미간을 찡그리며 그러게 항상 덤벼든다고 좋은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라고 말할 테지. 날카롭게 빛나는 금색 눈, 바람에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 한심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냉기가 감각을 마비시키기 시작하는 상황임에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즐란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이, 꽃병을 깼는데도 아무 말하지 않는 어른 의 시선에 아래에 서있는 듯 한 감정이 소복소복 쌓였다. 아마 가장 처음 그 감정을 느낀 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을 거다. 그 날은 햇살이 공격적일만큼 세게 내리쬐었다. 그리고 우리는 순찰을 도는 와중에 한 소녀와 그녀를 때리는 남자를 만났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몰랐지만-중요하지도 않았다-나는 동그란 눈 가득히 담긴 공포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선배들의 내리사랑으로 딸려 와서 뚱하던 아즐란은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경비대를 부르도록 하죠.”


 그래, 넌 괜히 딱딱한 척 굴지만 사실은 안이 말랑말랑한 거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시선을 받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좋은 생각이야, 근데 그건 너무 늦어.”


 훌륭한, 이성적인 대안이지만 경비대가 올 때 즈음이면 저 남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거나 아이와 말을 맞추겠지. 넘어져서 그랬던 거다. 아이를 훈육하느라 그런 거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남자가 가르친 대사를 더듬더듬 말한 어린 배우가 눈에 선하다. 내가 비틀거리는 척 둘에게 다가가자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하지 말라고는 안해서.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뜬 내가 남자와 툭, 부딪히자 내가 바라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미친 새끼가! 눈깔을 얻다 두고 다니는거야?”


 고함에 알콜 냄새가 잔뜩 실려 왔다. 그린 듯 한 반응에 감사하며 나는 검을 빼들고 가슴을 펴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키지 않길 바랐다. 나보다 존재감이 뚜렷한 검을 본 남자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미친 새끼라니, 평민이 기사를 모욕했을 때의 처벌은 알고 있겠지?”


 귀족이나 기사를 모욕할 시 즉결 처분이 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평민은 없을 것이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고 말도 안 되는 제도였지만 이런 상황에는 최대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아즐란. 나는 뒤에 서있을 후배에게 말했다. 


“나는 기사로서 모욕을 당했고, 지금 즉결 처분을 행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끼어든 게 아니야. 보고는 하지 말아달라는 염원을 듬뿍 담아 속삭였다. 돌아보면 아즐란이 못마땅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보였을 거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앞만 볼 수밖에 없었기에 뒤에 서있는 후배를 무시했다. 그 날 결국 너는 보고를 따로 하지 않았지. 


 피를 꽤 많이 흘렸나보다. 세상이 한번 뒤집혔다가 다시 요동치는 탓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내가 환각을 보는 건가? 아즐란이 찌푸린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너무나도 생경한 광경에 나는 나도 모르게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눌러주고 싶어져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젊어서 인상 쓰면.. 주름 생겨.”


 허. 저 허탈한 실소마저 아즐란 같았다. 내 상상력은 기대보다 엄청난 모양이다. 마지막에라도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날 전하지 못한 말을 입술에 머금었다. 


“..미안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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