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하루 하나

Behind the scenes

잡초양 2017. 7. 24. 19:31


 나는 악당이다.


 그것도, 천하에 둘 없을 정도로 비정하고 냉혹하고, 잔인한 악당. 


 나는 하나의 나라를 침략해서 그 곳을 식민지로 만들어 총독으로서 민중을 착취하던 인물이다. 대외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돕기 위한 조치였다고 그들을 기만했다. 심지어 민중들을 이간질하여 일부의 부유층들이 나를 지지하게끔 만들었다. 모든 정치적인 활동에는 돈이 필요하다. 돈이 없다면 아무리 굳건한 의지라도 모두에게 관통할 수 없다. 그리고 내 계획은 성공했다. 


 이리저리 꼬아놔서 복잡한 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숨겨진 음험한 욕망을 꿰뚫어보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미약한 그들의 목소리는 소용돌이처럼 거세게 부는 바람과 거칠게 이는 파도, 그리고 뿌옇게 끼는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현실을 바꾸려는 이들의 고개는 땅에 처박아 짓눌렸다. 그 사람이 나타가기 전에는.


 어느 날 갑자기, 잔잔한 수면에 퍼지는 파장처럼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 앞에 서있는 기사는 다른 나라에서 온 영웅으로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있어 희망의 등불이 된 존재다. 이 자가 나타난 다음부터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고, 이 상황이 잘못됐다는 걸 인식하고, 두 발을 굳건하게 땅에 내딛어 버텼다. 비록 내가 없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눈동자만 보이는 투구를 쓴 기사는 하얗게 빛나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아래로 내리쳤다. 나는 시리도록 날카로운 감각을 기대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내 눈 바로 앞에 검날이 꽂히더니 영웅이 뒤돌았다. 선선하게 이는 바람에 펄럭이는 망토 자락이 나긋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멀어지는 그 뒷모습이 같은 점이 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바라봤다. 


 모든 건 각본대로 맞춰서 흘러갔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플레이어가 이번 업데이트의 메인 퀘스트를 다 끝냈으니까 앞으로 내가 나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갑자기 내 인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서 스토리 작가가 이야기를 선회하거나 가끔 추억삼아 이 사람이 컷신을 다시 보지 않는 한.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나는 갑주를 벗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기다렸다는 듯이 달라붙었다. 볼에 얇은 감각이 간지러워서 한 손으로 거칠게 문질러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이건, 플레이어가 보지 못하는, 우리만의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악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