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하루 하나

2019.03.09

잡초양 2019. 3. 10. 00:07

 

저주 받은 악기나 연주자/연주를 듣는 사람의 생명력이나 인간성을 갉아먹는 악기에 대한 이야기를 동양풍으로 풀면 재미있을 거 같아서 써봄. 동양풍 느낌은 적지만 점점 생기지 않을까. 이름 짓기 되게 힘들다 은은 소리 은.

 

얼마동안 걸었던 걸까. 은은 어느새 지평선 아래로 허리를 숙이는 태양을 바라봤다. 무릎 아래로 감각이 사라진 소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나무 그늘 안으로 꼬꾸라졌다. 지면에 닿기 직전 몸을 둥글게 말아 옆으로 방향을 바꾼 덕분에 품에 안긴 악기를 짓누르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금으로 만든 악기보다는 자기 몸이 더 아팠을 거라고, 은은 생각했다. 눈동자를 슬 돌려 비파를 살펴보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양 팔 안에 가둔 비파가 무사한지 확인할 기력은 있었다.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깨끗한 표면은 금빛으로 빛났고 유려한 곡선이 손잡이에서 몸체로 부드럽게 이어졌다.

 

스승님이 이 비파를 은에게 안겨주고 굳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은아, 이걸 들고 멀리 가거라. 이 마을, 아니 그 어떤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가야한다. 그 말에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요? 왜 제가 그래야하죠? 저 혼자요? 스승님은요? 이 비파는 대체 뭡니까? 하지만 노인의 눈에 담긴 결연함에 은은 차마 되묻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스승은 마지막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늘 다정한 말만 올리던 입술이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절대, 피를 흘려서는 안된다라..”

 

그늘 아래에 잠시 휴식을 취한 덕에 머리가 맑아졌다. 은은 스승이 했던 수수께끼같은 말을 되뇌어보았다. 땅바닥에 반쯤 박혀버린 묵직한 악기를 들어 품에 다시 안았다. 지금까지 봤던 비파들과 달랐다. 모든 부분이 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했지만 줄들이 뻣뻣하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했다. 은은 너무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서 그런 게 아닐까, 조금은 느슨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곧은 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아야!”

 

줄에 손을 베였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붉은 선이 나타났다가 점점 굵어졌다. 아릿한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젠장,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혈액은 둥근 모양새를 띠며 주르륵 흘러 결국 비파에 툭, 떨어졌다. 그녀가 어떤 반응도 보이기도 전에, 쥐 죽은 듯이 잠들어있던 비파가 잠에서 깨어나 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온 몸이 얼어붙을 감각에 은이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바르르 떠는 비파의 목을 꽉-피가 나지 않는 손으로-붙잡았다. 방금 전까지 비파에 선명하게 남아있던 붉은 핏자국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말도 안되는 광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뭔가 홀린 듯이 은은 비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은쟁반 위로 옥구슬을 굴러가는 소리마저 탁하게 만들 음이 흘러나왔다.

 

동상처럼 굳어있던 현은 그게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유연하게 흔들렸다. 은의 손가락이 튕기는 대로, 유순하면서 탄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은 손끝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널찍한 비파의 몸체는 그 소리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머릿속 어딘가는 이러면 안된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은은 이미 비파의 달콤한 소리에 홀려버리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녀는 비파 연주를 멈추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왔던 곳과 반대 방향으로, 마을이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