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하루 하나

2019.03.08

잡초양 2019. 3. 9. 01:50

*가정폭력 암시 주의* 



물을 받고 냄비를 불에 올렸다. 푸른색 불꽃이 점점 냄비 바닥을 뜨겁게 달구고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라면 봉지를 뜯고 그 안에 있는 스프 봉지 두 개를 먼저 꺼냈다. 그리고 파란색 건더기 스프를 찢었다. 손바닥의 반보다도 작은 봉지를 탈탈 털자 녹황색 부스러기들이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나는 뚜껑을 덥고 뜨거운 물에서 건더기가 풀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계란을 톡, 하고 식탁 모서리에 내리쳤다. 깔끔하게 금이 간 계란껍질 사이로 찐득거리는 흰자에 싸인 노른자가 작은 그릇에 떨어졌다. 나는 긴 나무젓가락 한 쌍을 손에 들어 알끈을 제거했다. 알끈이 들어갔다고 버럭,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신중하게 반투명의 흰색 끈을 젓가락으로 집어든 나는 그걸 싱크대 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노른자를 터트리고 휘휘 섞었다. 투명했던 흰자위가 노른자와 뒤엉키면서 연한 노란빛을 띠었다. 병아리 같아. 무정란이라서 다행이다.

 

끓어서 부글부글거리는 물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뚜껑을 열어보니 기포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은색 봉지를 뜯어 붉은 가루를 솔솔 뿌렸다. 붉은 스프 가루를 금방 퍼져 물을 제 빛깔로 물들였다. 나트륨이 물의 끓는점을 상승시켜서 면발이 더 맛있다나 뭐라나. 그는 늘 스프 먼저라는 규율을 강조했다. 나는 코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손에 힘을 주었다. 스프를 마지막에 넣어도 모르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프 봉지는 구겨졌다.

 

면발을 반으로 뚝 쪼개어 물이 넘치지 않게 잘 집어넣었다. 튀겨진 면발에서 기름이 배어나와 얼큰한 국물에 깊은 맛을 더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뚜껑을 다시 닫았다. 곧 투명한 돔에 김이 끼었다. 뚜껑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 150초 쉰 후 나는 뚜껑을 열고 풀어넣은 계란을 쏟아부었다. 면발 사이사이로 계란이 잘 스며들도록, 젓가락으로 두세번 빙글빙글 돌렸다. 뒤 이어 30초 정도 기다리고 라면을 그릇에 옮겨담기로 했다.

 

하얀 그릇-그는 꼭 하얀 그릇에만 먹는다. 그것도 붉은 기름이 덕지덕지 묻어나는.-에 라면을 담았다. 국물을 먼저 담고 그 위에 면을 올렸다. 그 사람을 원하는 방식대로. 그런 다음 김치를 반찬 그릇에 가지런히 놓았다. 다 먹지도 않으면서 김치를 꺼내지 않으면 어떻게 밥을 먹냐고 짜증을 내곤 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누르고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니 불쾌한 감정이 솟구쳤지만 참았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아주 아주 작은 디테일 하나 추가하기로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검지 만한 유리병을 꺼냈다. 형광등에 찰랑찰랑 흔들리는 무색의 액체. 아무도 모르게 실험실에서 청산가리를 조금씩 가지고 나온 게 이제야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직접 사용하려고 했다. 청산가리를 먹으면 괴롭다고 하지만 어차피 삶보다 괴로운 건 없으니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간편한 해결방안을 떠올린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라면 위로 액체를 둥글게 뿌린 나는 라면 그릇과 반찬을 쟁반에 위에 올려놓고 안방을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역한 술 냄새에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지만 적잖은 노력으로 미소를 유지했다. 마지막으로 볼 얼굴인데 이정도 못해줄까. 라면 냄새에 비적비적 일어나는 남자가 눈을 비빌 동안 손때가 탄 몽둥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따가 저거부터 불태워야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눈은 적당히 가늘게 뜨고 입꼬리는 조금 올리면 된다. 지금까지 계속, 줄곧 했듯이.

 

맛있게 드세요, 아버지

 

그릇을 내려놓고 말을 더 붙이지 않았다. 키득거림이 새어나올까 봐 황급히 뒤돌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