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05
도착이다.
인어는 잡고 있던 천을 놓고 뒤돌아봤다. 원래 조용한 성격이라 그런지 “왕자”는 아무 말 없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재미없네. 입술을 살짝 내민 인어가 그를 수중 동굴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투덜거렸다. 왕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들어갔다. 차라리 처음에 신이 나서 열심히 춤추거나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을 때가 나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려 “왕자”였다. 어린 시절 전설에서나 나온다고 생각했던 왕자.
수면 위로 올라가 발견한 “배”는 전설속의 배와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인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사소한 부분들이 변한 게 분명하다. 아무튼, 수면 위로 떠다니는 건물 위에 있는 인간이 왕자가 아닐 리가 없다. 그래서 인어는 가장 자신 있는, 매혹적인 얼굴을 내밀어 왕자에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온 순간, 뒷목을 잡아 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인어들이 이토록 수면에 가까이 오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 침묵마저 삼켜버릴 듯 한 어둠과 그에 걸 맞는 냉기가 감도는 심해를 선호했다. 그래서 그녀는 수중 동굴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여전히 말없이 따라오는 왕자의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벗긴 그녀가 혀를 작게 찼다. 이런 걸 걸치니 빨리 못 움직이는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인어가 휙,하고 팔을 움직여 천조각을 최대한 멀리 떠나보냈다. 해류가 그걸 이곳에서 멀리, 아주 멀리 데리고 갈 것이다.
인어는 왕자의 얼굴을 조심히 뜯어보았다. 자신처럼 눈-어딜 보는 거야 날 안 보고-두 개와 코 하나가 있었다. 목을 천천히 쓸어내려보니 아가미는 없었다. 자기 목에 팔랑이는 아가미를 반대쪽 손으로 만지다가 이내 관심을 입가로 옮겼다. 처음 물속으로 끌어당겼을 때 마구 벌어지고 좁아졌다가 이상한 소리를 잔뜩 내던 입술은 잠잠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자가 심심했는지 입에서 한껏 뿜어내던 거품도 이제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을 왕자의 벌어진 입 안으로 넣어봤다. 반응이 없었다. 물고기들, 특히 이빨이 날카롭게 난 물고기였다면 눈 깜짝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물었을 테다. 하루 종일 바닷물의 움직임 속에서 흔들리는 말미잘만큼이나 멍청해보이는 모습에 인어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맑고 청명한 소리는 번져갔다. 잔뜩 구겨진, 우스운 얼굴도 이제는 표정을 담지 않았고 목을 감싸 쥐던 손도 맥이 풀린 채 물 속을 유영했다.
인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놀아줄 거야. 우리 뭐할까? 대답 없는 질문이 바다에 녹아들었다.